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211

무화과 / 김지하

무화과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 「애린」, 실천문학사, 1986 ; 「김지하 시전집」, 솔, 1992

엘니뇨, 엘리뇨 / 윤금초

엘니뇨, 엘니뇨 들끓는 적도 부근 소용돌이 물기둥에 우우우 높새바람, 태평양이 범람한다 엘리뇨 이상 기온이 내안(內岸) 가득 밀린다. 날궂이 구름 덮인 심란한 나의 변방(邊方) 이름 모를 기압골이 상승하고 소멸하는...... 엘리뇨 기상 이변이 거푸 밀어닥친다. 바닷가재, 온갖 패류, 숨이 찬 산호초에 우리 친구 물총새 끝내 세상 뜨는구나, 저마다 세간을 챙겨 브릉브릉 뜨는구나. * 「네 사람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1983

우리들의 산수(山水) 2 / 박정만

우리들의 산수(山水) 2 오동잎 피는 밤의 수틀 속으로 초롱의 불빛이 화사하게 피어오를 때 숙(淑) 아, 다홍치마 붉은 네 살빛 속에 내 마음의 홍초꽃도 점점이 불을 켜 갔다. 밤 이 저 홀로 녹아, 소쩍새 울음 속에 밤이 찌르르 저 홀로 녹아 마당귀 고란초 꽃잎만 건드려 놓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속으로 마냥 애가 터져서 문설주 에 귀를 놓고 울음 울었다. 얼굴 하얀 숙(淑)이, 너의 박하분 냄새, 긴 모가지 며 뽀오얀 버선발과 둘레둘레 사방을 살피는 모양이며 둬둬둬 돼지를 몰거나 쫓는 소리. 뒤란엔 때없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끝난 뒤엔 으례 적막이 뒤덮혀 꽃수풀을 이루고, 그 꽃수풀 위로는 어김없이 초록의 귀뚜라미가 기어갔다. 그 런데도 너는 죽도록 말이 없어서 밤이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

오후 두 시 / 박정만

오후 두 시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어디선가 허공을 무너뜨리면서 마치 산악과 같은 조수가 밀려와서는 두 시의 내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급히급히 침몰당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 살짝 꺾여진 여름날의 두 시의 빛의 매장,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고요함이 고요함으로 무너지고 빈 소리가 빈 소리로 요란하던 것을. 그러나 세상은 세상, 반쯤은 병(病),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병(病)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내 귀를 지하(地下)로 내리게 하는 그러나 폭풍(暴風)은 폭풍,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칼이 칼로써 무너지고 반쯤은 죽음, 죽음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 「잠자는 돌」, 고려원, 1979 ; 「박정만 전집」, 외길사, 1990

극야 / 신대철

극야 -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1 서울이나 평양에서 오지 않고 사우스 코리아나 노스 코리아에서 오지 않고 우리가 어린 시절 맨 처음 구릉에 올라 마주친 달빛을 눈에 가슴에 다리에 받 아와 꿈을 뒤척이던 그 금강 그 개마고원에서 온 날은 구름에 살얼음이 잡히고 광륜을 단 두 개의 달이 마주 떠 얼음 안개 속을 스치는 화살 다리를 비추고 있 었던가요. 화살 다리* 그 아래 낮은 판잣집 지붕 밑에서 에스키모들은 술과 마약과 달러와 민주주의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우리는 빙평선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가요. 그 날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자 당신은 '개마고원요' 하고 얼어 있는 나와 갑자기 내 뒤에서 저절로 맞춰진 우리의 환한 얼굴까지 함께 보 았지요. 그 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서로..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 신대철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남향(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산 아래로 천 개의 시 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산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 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 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 「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77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우리가 물이 되어」, 문학사상사, 1986

그대의 들 / 강은교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 「벽 속의 편지」, 창작과비평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