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을 읽다 / 박훈 - 2016년 11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주름을 읽다 헤아려 본 적 없는 아버지 시름 한쪽 마음 속 닫아걸고 쉰 목청 호흡 따라 오랜 밤 부둥켜안고 숨기고만 싶었을까 지나온 길목마다 기억을 새겨놓고 발코니 장판 베고 모로 누운 저 목발 숨결을 다독거리며 주름살을 살핀다 지상의 막바지 길 침 삼키며 기다리는 아직도 뛰고 있는 피톨들을 꺼내볼 때 새벽이 동살을 타고 뜨겁게 배달된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독방 / 김태경 - 2016년 11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독방 '혀'를 가만 떠올리자 책 귀가 늘어진다 해는 이미 저버렸고 기다림도 끝이 났다 꼭 한 번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었는데 애초부터 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 골짝 두꺼운 책 속에서 마른 혀가 자라난다 사라진 그림자 너머 자모 잃은 외침들 숨겨도 드러나는 몸을 안은 새 한 마리 갈래진 혀 추스르고 노래를 시작한다 밑바닥 여린 속삭임 하늘에 가 닿을까? 축 처진 붉은 혀는 책갈피에 가둬둔 채 조각 난 페이지마다 조등을 달고 보면 도시는 아침이 와도 홰를 치지 않는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깊이를 더하다 / 이성목 - 2016년 11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깊이를 더하다 꽁꽁 언 저수지에 새 한 마리 박혀 있다 세상을 빠져나갈 출구인 줄 알았을까 저 새는 깨진 부리로 비명에 쩡, 금을 냈다 둑방길 억새들도 머리채 잡혀 떨고 목숨을 헹구어 낼 커다란 대야 하나 흰 눈이 회오리치며 찬 주검을 덮는다 계절이 막다른 곳 허공에 빗장 걸 듯 한사코 막아서는 이 악문 표지 아래 한 줌인 새의 무게가 그 깊이를 더했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노을 / 박방 - 2016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노을 그림자로 채색된 뒷산 봉우리 너머 하늘이 붓질 끝내고 심장을 꺼내든다 창틀 속 수묵화 한 폭 낙관이 참 벌겋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부추꽃 / 고해자 - 2016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부추꽃 바닷가 텃밭에 든 밀물녘 파도처럼 한 무리 부추꽃이 하얗게 부서진다 조가비 빈 껍질 같은 스레트집 기울듯이 멈칫, 멈칫대던 비행기도 보내놓고 제주시 알작지왓 굴러왔다 굴러가는 새까만 몽돌들 같은 저 하늘의 풋별들 어느 날 일자리를 박차고 나온 아들 녀석 이제 또 어느 땅을 굴러가고 굴러갈까 간간이 집어등 몇 채 끌고 가는 수평선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새집 / 김진숙 - 2016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새집 변두리 변두리로만 지척지척 헤매 돌다 황토 흙 몇 삽 떠내고 편안하게 누우셨다 찔레꽃 진한 향내가 슬몃 따라 눕는다. 평생을 돌아쳐도 집 한 칸 장만 못한 문패 없는 삶 저켠에 낯설은 비석 하나 아버지 새집 곱게 앉혔다 경주 김공 돈규 묘.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8
컴퍼스 / 안창섭 - 2016년 9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컴퍼스 한발로 점을 찍어 끝에서 보고 싶어 구름을 몰고 가는 바람이 부러워서 당신의 반지름의 말, 모둠발로 듣는다. 눈부처 기다리다 돌아선 갈림길이 바람의 행적까지 허공에 묻고 나면 둥글게 하나가 되어 떠날 때도 중심이다 당신의 중심에서 쓰러지는 동그라미 서로를 증명하는 시작과 끝점에서 이별이 발자국처럼 그림자로 남는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1
타래난초 / 장옥경 - 2016년 9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타래난초 아픔도 삭혀지면 고운 빛 머금을까 타래타래 꼬인 삶 외줄 타고 오르는 길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깨어나는 붉은 꽃잎 곧게 뻗은 수직의 길 등불 하나 밝혀들고 가냘픈 꽃대에 작은 꿈 매달고서 톡 치면 뎅그렁 울리는 하늘 종 되어서 하늘 끝 너머엔 그 누가 기다릴까 강을 건너고 자갈길 지나서 오롯이 오체투지로 오르는 순례자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1
입동 / 이가은 - 2016년 9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입동 나무가 잎 다 놓자 그림자도 따라갔다 푸른 나날 빠져나가 멍든 몸만 덩그러니 한 평생 거두어 갈 때 구십 노모, 그랬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1
춤추는 창문 / 정춘희 - 2016년 8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춤추는 창문 에메랄드 하늘가에 잿빛구름 군무하고 나직이 비에 젖은 나뭇잎이 몸 부빈다 피아노 삼중주 하듯 은은히 퍼진 오후 하르르 운율 타는 오선지에 음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길을 내는 무한 분열 춤추는 창문에 출렁! 금빛 물살 세운다 달江 - 중앙시조백일장 입선작 2022.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