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211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청산행(靑山行)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 「청산행」, 민음사, 1982

침묵 피정 1 / 신달자

침묵 피정 1 /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 드리고 싶다. *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2004

등잔 / 신달자

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아버지의 빛」, 문학세계사, 1999

아이들한테 가는 길 / 감태준

아이들한테 가는 길 / 감태준 일곱 살 여덟 살, 나를 닮은 아이들이 역에 나가 우는 것은 내가 철길을 따라 너무 먼 도시로 온 탓이다 내가 도시를 더듬고 다니다가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잃어버린 탓이다 저희들한테 가는 길을 찾는다 해도 이젠 같이 놀아줄 수 없이 닳아빠진 얼굴을 나는 차마 내밀 수 없는 탓이다 안개 속에 묻히는 철길을 바라보며 또 어디 몇 군데 연탄재같이 부서지는 마음아 눈 오는 이 밤 따라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우는 것은 내가 저희들한테 돌아갈 기약마저도 없는 탓이다 * 「월간 조선」, 조선일보사, 2001. 12

흔들릴 때마다 한잔 /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 감태준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 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 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 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 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

대가천 2 / 이하석

대가천 2 - 은어 낚시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의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 그 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은어를 본다, 언어에 기대어서. 이건 물론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 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 그 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부서진 활주로 / 이하석

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멀리까지 보이는 날 / 나태주

멀리까지 보이는 날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백자송(白磁頌) / 임영조

백자송(白磁頌) 가진 것 다 내주고 정말 사심 없으면 늙어서도 저렇게 빛이 나는가 언제나 텅 빈 가슴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이승의 시름까지 하늘에 닿고 희다못해 푸르른 영혼을 본다 본래 두메에서 태어나 늘 당하고도 말없이 살아온 관심 밖 한줌 신분이기로 그래서 누구나 밟고 가는 흙이었기로 너의 눈부신 출세를 믿을 수가 없구나 어느 날 문득 임자를 잘 만나 하얀 속살로 환생한 너는 아직도 만삭의 몸을 풀지 못하고 온갖 그리움만 잉태한 차고 흰 만월로 떠 있었구나 살아생전 가진 것 다 내주고 퍼낼 것 다 퍼내고 가장 속깊은 사랑을 연옥에 던져 영원한 색깔로 다시 태어난 이조(李朝)의 한 여인, 그 슬픈 내생을 쟁쟁(錚錚) 울리는 속살을 본다. * 「그림자를 지우며」, 시와시학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