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우리들의 산수(山水) 2 / 박정만

낙동강 파수꾼 2020. 10. 10. 17:01

 

우리들의 산수(山水) 2

 

 

 

   오동잎 피는 밤의 수틀 속으로 초롱의 불빛이 화사하게 피어오를 때 숙(淑)

아, 다홍치마 붉은 네 살빛 속에 내 마음의 홍초꽃도 점점이 불을 켜 갔다. 밤

이 저 홀로 녹아, 소쩍새 울음 속에 밤이 찌르르 저 홀로 녹아 마당귀 고란초

꽃잎만 건드려 놓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속으로 마냥 애가 터져서 문설주

에 귀를 놓고 울음 울었다.  얼굴 하얀 숙(淑)이, 너의 박하분 냄새, 긴 모가지

며 뽀오얀 버선발과 둘레둘레 사방을 살피는 모양이며 둬둬둬 돼지를 몰거나

쫓는 소리. 뒤란엔 때없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끝난 뒤엔 으례 적막이 뒤덮혀

꽃수풀을 이루고, 그 꽃수풀 위로는 어김없이 초록의 귀뚜라미가 기어갔다. 그

런데도 너는 죽도록 말이 없어서 밤이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꾸역꾸역 먹구름

만 밀려왔다. 너로 인하여.

 

* 「박정만 전집」, 외길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