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211

그녀, 요나 / 김혜순

그녀, 요나 / 김혜순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 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와요 아아,..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 김혜순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 김혜순 솥이 된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1911년 건조되었고, 선적지는 사우샘프턴 속력은 22노트, 여객선, 한 번 항해에 2천 명 이상 탑승한 경력 내가 결혼한 해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빵 굽는 토스트, 아니면 주전자, 중국식 프라이팬 한국식 압력 밥솥이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 육지 생활에 여전히 적응 못 하는 퇴역 선장 그래서 솥이 되어서도 늘 말썽이 잦다 나는 밥하기 싫은 참에 압력 밥솥 회사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자꾸 김이 새잖아요? 내가 씻은 쌀이 도대체 몇 톤이나 될까.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식탁을 차 리고, 다시 쌀을 씻고, 솥을 닦고, 숟가락을 닦고, 화장실을 닦고, 다시 쌀을 씻는다. 닭의 뱃속에 붙은 기름을 긁어내고, 살을 씻고, 생선의 내장을 ..

텔레비전 / 최승호

텔레비전 /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모습 드러내지 않네 지난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해방되어 강물로 뛰어들었네 기를 쓰며 울어대던 말매미들이 모두 입적한 가을 붉은 단풍이 고산지대로부터 내려오고 나무들은 벌거벗을 준비를 하네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를 걷고 있을까 툭 트인 암자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까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계곡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

재 위에 들장미 / 최승호

재 위에 들장미 / 최승호 해질녘이면 공룡들은 고개를 들고 불길한 그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저탄장의 석탄더미는 한때 양치식물들의 숲이었다 중생대의 잿더미 무개화차는 수북하게 석탄을 싣고 탄광지대의 거무스럼한 철길을 지나간다 광부의 도시락과 술집에서 늙은 여자의 노래와 쌍굴다리를 내려오던 코흘리개 아이들을 나는 기억한다 들장미는 재 흘러내리는 철로변에 있었다 그것은 피사체가 아니었다 마음은 사진기계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들장미가 있었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향기로운 한 송이 인간이 아니었다 우울하게 나는 다시 길을 갔다 그 뒤로도 이십 년을 무겁게 나는 걸어왔다 들장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잿가루 흩날리는 철로변에 기우뚱하니 피어 있을까 ..

음악 / 이성복

음악 / 이성복 비 오는 날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그해 가을 / 이성복

그해 가을 / 이성복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

손금 / 문충성

손금 / 문충성 내 손금에서 눈부시게 자라나던 무지개여 이제는 눅눅한 찬 땀만 배어나누나 이 겨울 침침하게 눈은 내리고 얘들아 우리들 서러움 죄 풀어 우리들아 어린 왕자의 무덤을 불 밝혀내자 새파랗게 사금파리로 도깨비불을 빚어내자 길이야 많지만 언제나 도깨비불로 열리던 길 그러나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마법의 나라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존재의 아이들을 언 손 비비며 티없는 슬픔 속에서 잠 깨어나게 하자 얘들아 얘들아 어디에 있니 내 음성에도 풀풀 눈은 내리고 눈은 내려 누구의 손금 속에 갇혀 있느냐 시방 얘들아 얘들아 다시 만날 순 없겠느냐 지금 나는 혼자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내가 없구나 동서남북 찬땀이 강물을 이룬 길 동서남북 길이 보이지 않는구나 얘들아 나를 찾아내다오 얘들아 얘들아 * 「내 손금에서..

제주바다 1 / 문충성

제주바다 1 / 문충성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와 어둠 을 밀어내는 괴로워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 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땀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닷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

눈 그친 날 달마의 차 한 잔 / 최동호

눈 그친 날 달마의 차 한 잔 / 최동호 -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은산철벽 마주한 달마에게 바위덩이 내려누르는 졸음이 왔다 눈썹을 하나씩 뜯어내도 졸음의 계곡에 발걸음 푹푹 빠지고 마비된 살을 송곳으로 찔러도 졸음이 몰아쳐왔다 달마는 마당으로 나가 팔을 잘랐다 떨어지는 선혈이 튀어* 하얗게 솟구치는 뿌연 벽만 바라보았다 졸음에서 깬 달마가 마당가를 거닐었더니 한 귀퉁이에 팔 잘린 차나무가 촉기 서린 이파리 햇빛에 내보이며 병신 달마에게 어떠냐고 눈웃음 보내주었다 눈썹도 팔도 없는 달마도 히죽 웃었다 눈 그친 다음날 바위덩이 졸음을 쪼개고 솟아난 샘물처럼 연푸른 달마의 눈동자 (여보게! 차나 한 잔 마시게나) * 혜가는 어깨 높이로 눈 내린 날 밤 스승에게 법을 물었다. 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