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211

하류 / 이건청

하류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황야의 이리 2 / 이건청

황야의 이리 2 탱자나무가 새들을 깃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 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들을 몰고 가는 바람소릴 듣겠다. 불 꺼진 골목처럼 어둠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밤새도록 깨어 있겠다. * 「하이에나」, 문학세계사, 1989

형제 / 김준태

형제 초등학교 1, 2학년 애들이려나 광주시 연제동 연꽃마을 목욕탕- 키가 큰 여덟 살쯤의 형이란 녀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섯 살쯤 아우를 때밀이용 베드 위에 벌러덩 눕혀 놓고서 엉덩이, 어깨, 발바닥, 배, 사타구니 구석까지 손을 넣어 마치 그의 어미처럼 닦아주고 있었다 불알 두 쪽도 예쁘게 반짝반짝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게 보기에도 영 좋아 오래도록 바라보던 나는 "형제여! 늙어 죽는 날까지 서로 그렇게 살아라!" 중얼거려주다가 갑자기 눈물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 「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오라, 거짓 사랑아」, 민음사, 2001

보석의 노래 / 문정희

보석의 노래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 시간을 으깨 만든 이건 오직 나의 것이에요 시리도록 눈부신 광채 아무도 모르는 짐짓 별과도 같은 이 영롱한 슬픔 곁으로 그 누구도 다가서지 말아요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불귀(不歸) / 김지하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혀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