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211

풀이 마르는 소리 / 최동호

풀이 마르는 소리 / 최동호 벽지 뒤에서 밤 두시의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건조한 가을 공기에 벽과 종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밀착시키던 풀기 없는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허허로워 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 공간이 부푸는 밤 두시에 보이지 않는 생활처럼 어둠이 벽지 뒤에서 소리를 내면 드높다, 이 가을 벌레소리. 후미진 여름이 빗물진 벽지를 말리고 마당에서 풀잎 하나하나를 밟으면 싸늘한 물방울들이 겨울을 향하여 땅으로 떨어진다. * 「황사바람」, 열화당, 1976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용연향」, 나남출판, 2001

용연향 / 김정란

용연향* / 김정란 당나귀 등 위에 내 썩은 혀 한 짐 딩동 문열어라 * 용연향(龍涎香) : 몇 종류 안되는 동물성 향료의 하나. 말향고래 창자 속에 들어 있는 이물질이 고여 썩은 뒤 만들어진 값비싼 향료. 향기 성분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그대로는 향기가 없으나 다른 향료와 작용하여 영속적인 향기를 낸다. * 「용연향」, 나남출판, 2001

연하계곡 / 장석주

연하계곡 / 장석주 충주 제천 지나자 들의 평등이 급격히 흐트러지며 척추 세우고 일어선 산세가 사나워진다. 죽기 위해 먼 곳 가는 사람과 살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나는 철새들이 하늘과 땅에서 엇갈린다. 영월 늦은 저녁 밥때 여윈 불빛 몇 점 저문 길을 전송하는데, 저녁빛 속으로 내륙의 길들은 침전한다. 낭떠러지를 매달고 오르는 오르막차로 끝 지점 열린 허공에 입동 하늘은 퍼렇다. 먼 것은 멀리 있다는 까닭으로 푸른 멍들을 몇 개씩 갖고 있다. 청령포와 장릉을 일별 한 뒤 연하계곡 방향으로 빠지는데, 첩실 소생의 그늘 짙은 살림 형편보다 찬 물길 키우는 계곡의 처지가 낫다 못하리라. 에움길 두엇 새끼처럼 끼고 도는 연하계곡 휘돌고 감돌아 나가는 저 물길에 가 닿는 마음속을 저미며 들어오는 그릇과 숟가락 부딪..

그리운 나라 / 장석주

그리운 나라 / 장석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

산문에 기대어 /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 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산문에 기대어」, 문학사상사, 1980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