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낙동강 파수꾼 2021. 7. 27. 17:34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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