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모습 드러내지 않네
지난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해방되어
강물로 뛰어들었네
기를 쓰며 울어대던 말매미들이
모두 입적한 가을
붉은 단풍이 고산지대로부터 내려오고
나무들은 벌거벗을 준비를 하네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를 걷고 있을까
툭 트인 암자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까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계곡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열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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