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 김혜순

낙동강 파수꾼 2022. 2. 21. 21:08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  김혜순

 

 

 

   솥이 된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1911년 건조되었고, 선적지는 사우샘프턴

   속력은 22노트, 여객선, 한 번 항해에 2천 명 이상 탑승한 경력

   내가 결혼한 해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빵 굽는 토스트, 아니면 주전자, 중국식 프라이팬

   한국식 압력 밥솥이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

   육지 생활에 여전히 적응 못 하는 퇴역 선장

   그래서 솥이 되어서도

   늘 말썽이 잦다

   나는 밥하기 싫은 참에 압력 밥솥 회사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자꾸 김이 새잖아요?

   내가 씻은 쌀이 도대체 몇 톤이나 될까.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식탁을 차

리고,  다시 쌀을 씻고, 솥을 닦고, 숟가락을 닦고, 화장실을 닦고, 다시 쌀을

씻는다. 닭의 뱃속에 붙은 기름을 긁어내고, 살을 씻고, 생선의 내장을 꺼내고,

파를 다진다. 다시 쌀을 씻는다.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  '또 하나의 타이타닉'

표 압력 밥솥, 과연 이것이 나의 항해인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우리집에 정박한 한국식 압력 밥솥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불쌍해라, 부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밥하는 거 지겨워

   설거지 하는 거 지겨워

   그럼 그것도 안하면 뭐 할 건데?

   압력 밥솥이 내게 물었다

   뱀처럼 밥 먹고 입을 쓰윽 닦지

   내가 대답했다

   영사기에서 쏟아지는 빛처럼 가스 불이 솥을 에워싸자 파도가 끓는다

   스크린처럼  하얀 빙산에 배가 부딪힐 때

   밤 바다로 쏟아져들어가는 내 나날의 이미지

   물에 잠겨서도 환하게 불켜고

   필름처럼 둥글게 영속하는 천 개의 방

   느리디느린 디졸브로

   솥이된 여자, 그 여자가

   곧, 스타들과 엑스트라들이 끓어오르는 흰 파도 속에서 잦아든다

   그 이름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

   화이트 스타 선박 회사 건조  

   수심 4천 미터 속 부엌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짙푸른 바닷속에 붉은 녹을 풀어넣고 있다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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