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필름 / 김상우 흑백 필름 마른 나뭇잎 한 장에선 아, 하고 바스러지는 한 컷의 시간 수만 개 나뭇잎을 매달고 있는 가문비나무 숲 속엔 아, 하고 바스러지는 수만 컷의 겹쳐진 시간들 明暗과 정신의 높낮이로 읽어야 하는 사람의 아픈 몸 그 어디에도 아! 아! 소리치지 않는 곳이 없다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갈대 / 김상우 갈대 청량한 가을 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꼿꼿한 老後여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냉이꽃 / 김상우 냉이꽃 모질기도 하구나 장하기도 하구나 오고가는 길섶에서 밟혀 죽은 줄 알았더니 꽁꽁 겨울바람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납작한 이파리마다 어느새 푸른빛 띄우고 모가지 길게 뽑아 눈물겨운 밥사발 가장자리 늘어붙은 밥풀 같은 꽃잎 몇 개 달고 天下의 봄을 호령하는 너는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나팔꽃 . 2 / 김상우 나팔꽃 · 2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나팔꽃 푸른 눈으로 잎 내밀고 발 만들어내고도 일어설 생각은 없다 나팔꽃의 중심은 허공에 있다 갈 길 멀기라도 한 것인지 하늘 맞닿는 그곳이 제 집이란 듯 나무든 담장이든 칭칭 감아 위로 밀고 오른다 길, 막힌 곳이 길이다 막무가내 벙어리 그대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새 . 7 / 김상우 새 · 7 새는 날면서 하늘을 노래하지만 평생 한번도 광활한 자유의 구속을 알지 못한다 마침내 하늘에 가득히 쌓일 뿐인 보이지 않는 너희들의 뼈와 무덤 또는, 노을 물든 서녘하늘 위로 구름 되어 쓸쓸히 빛나는 설레며 솟구치던 날의 부푼 날개여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밥상 앞에서 / 김상우 밥상 앞에서 철 늦은 눈이 내리고 교회당 첨탑 위에서 까치가 운다 아침 밥상에 앉아 동치미 우적우적 씹는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침묵의 틈 사이로 몇 송이 눈 낮게 떨어지고 날개도 없이 날아간 불구의 시간들이 입안에서 절룩거린다 허공을 퍼 올리는 숟가락 꺼억, 꺼억, 까치는 아직도 울고 있다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금간 벽 / 김상우 금간 벽 온 몸뚱이로 걸어왔으나 살갗 터지도록 뒹굴어 보았으나 아직도 하늘로 머리 두고 사는 법조차 몰라 지렁이 몸뚱이 그대로 지나갑니다 먼지의 자욱만 남겨놓고 갑니다 그대로 두어 주십시오 다음 생에 못하면 그 다음 생에 흰 무명 걸레라도 되어 깨끗이 닦아놓고 가겠습니다 그대로 두어 주십시오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웃음 / 김상우 웃음 한 뼘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태어나 일그러진 주름의 골을 헤집고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사랑꽃을 피워 올리는 눈부신 그대 아스팔트 위에서 콘크리트 속에서 세상을 떠받치는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
낙타 / 김상우 낙타 흙먼지 그득한 이 세상으로 운반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 무게에 겨운 삶 더하여 메고 통과할 길 없는 우리에 갇혀 선한 눈 껌벅이며 삭이는 세월, 그 질긴 황량함을 견디는 흐르는 風景 - 자작詩 2020.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