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0 / 김광림

낙동강 파수꾼 2020. 4. 4. 13:50

 

0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수치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허탈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 창구를 찾아들지만

추심할 곳이 없는 현세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

 

* <갈등>, 심상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