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사원 / 신용목
오후의 모든 빛이, 잠시, 여기에 눕는다. 잘못
든 길이 열어준 마지막을 나는 동굴의 끝을 밟듯
하얗게 조각나는 망막에 담아야 했다. 이 낯선 시
간 속에 사막이 있고 강이 흘러 긴긴 모래바람을
지나 범람의 유적을 따라가면, 우주로 가고 싶은
종족이 살고 있어 육십 개의 손가락을 달고 낮 밤
없이 별을 셈해 유난히 눈자위가 희어진 사람들.
붉은 가죽을 두른 검은 영혼들 속에서 나는 사라
센의 슬픔을 보았다. 살라트의 울림이 대리석 위를
미그러질 때 뜻도 모르게 찍혀 있는 문자 속에서
내 이름을 읽고 휘청거렸다. 신이 지은 땅이 신이
가진 부력을 배반했으므로 결국 우주로 가지 못한
자들, 오십 개의 손가락을 잘리고 남은 열 개로 기
둥을 세웠다. 이 오랜 엎드림이 있는 한 범람은 강
의 수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바람은 사막으로부
터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사원은 수많은 손가락을
묻었으리라. 여전히 눈자위가 희어, 잘못 든 길에
는 늑골을 펴서 닿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다만
야윈 종족을 휘감고 종소리 우주를 넓혀갈 때 나
는 낯선 문자 앞에서 열 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았
다. 빛의 몸체를 닮은, 저 기둥으로 인해, 땅의 공
기가 가벼워지고 우주는 저토록 멀리 있었다.
♣ 詩 들여다보기
우리가 걸어야 하는 바람은 무엇일까.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을 때 실존적인 불안을 느끼며 종교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폴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불안이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불안, 인생의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에 대한 공포,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염려와 같은 것들이다. 신에 대한 의지는 바로 존재의 유한성 때문이다.
이슬람 신자는 메카를 향하여 연신 절을 하고 기도드린다. 전쟁터에서도 그쪽을 향해 하루 다섯 번씩 엎드려 절한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기도하는 걸까. '라마단'이라는 금식 기간에는 물을 포함하여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순종적인 응답을 위해 자신을 힘겹게 비워내야 한다. 그토록 간절하게 닿으려 했던 "우주로 가고 싶은" 마음으로 신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부드럽다가 거칠게 포효하듯, 둥근 선과 직선의 돔은 신비스런 조화를 이룬다. 사원의 돔과 첨탑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대표적 건축 양식이다. 모스크라는 말은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마스지드가 영어로 변형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모스크이다. "사라센"들이 "살라트"를 하듯이 시인은 차분한 시선으로 "내 이름을 읽고 휘청"이며 자신의 내적 어둠이나 상처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머문 풍경 속에서 "우주로 가지 못한" 방황을 시인은 "열 개의 손가락을 세"워 치유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이 오랜 엎드림이 있는" 이슬람 사원을 통해 겸손하게 조탁해낸 언어로 삶을 바라본다. 시적 대상을, 인식을 단순히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특별한 시각으로 대상을 재해석한다. 사실 자신의 내적 상처를 보여주거나 시대의 주변부에 위치한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모든 시인들의 시편들에서 보편적으로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에서는 독특한 표현법으로 흔한 소재들이 재해석되어 탄생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시를 읽을 때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호함으로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도, 과장되게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특징은 바람과 햇살처럼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자연 현상과 그들이 스쳐지나가고 있는 대상물을 시인만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바람은 사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천성적으로 자본주의와 잘 안 맞지만, 그런데도 여기서 잘 살고 싶고, 그 욕망들이 계속 그 안에서 충돌하다보니까 자의식과 현실 속 욕망이 항상 나란히 가지 못하고 엉키며 방황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딪히고 괴로워하듯 "눈자위가 희어"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우리는 신을 찾고, 의지하며 "늑골을 펴서 닿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우주 밖의 세계를 갈망한다.
이슬람 사원 앞뜰의 나무들도 계절을 보내고 있을 테고, 하얀 차도르를 입은 여자들 몇몇이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사소함을 아름다움으로 휘감아 긴장된 열기로 타오르게 만들고 싶어 "열 개의 손가락을 펼쳐 보았"으나 우주를 부르는 시선은 "저토록 멀리" 삶과 시간 속에 있는 자의식에 있다. 우리가 바람의 미풍처럼 살아가듯 개척해 나갈 내일이 있다.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시작이라 믿고 어제를 버린다. 'ever'는 가능할지라도 'forever'는 불가능한, 능력 밖의 인간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알려지지 못한 채 죽어간 모든 사람들이 무심히 내일만을 기다렸던 것이라면, 어떻게든 살아가야 해서 살았던 것이라면, 세상에 불온한 존재로 희생된다.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바람을 다 걸어가기 위해 "오후의 모든 빛이, 잠시, 여기에 눕는다." 우리가 평생을 읽어 내려가도 부족한 우주를 향해 시인의 한 걸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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