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가는 길 / 임영조
성주산 물소리에 새벽잠 털고
여관을 빠져나와 혼자 걸었네
난생 처음인데 꼭 와본 것 같은 길
걷다가 너무 뜻밖에 만난
전생에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 같은
씨방을 막 날려버린 민들레와 걸었네
귀 시린 시냇물이 졸랑졸랑 따라나서고
나승개꽃 광대나물꽃 오이풀꽃들
자운영꽃 만개한 논두렁의 염소와
누렁개와 장닭과 푸른 숲이 예사로
나를 받아주는 곳, 내년쯤 수몰된다는
기막힌 사연에 왈칵, 목이 메는 길
이다음 그대와 묵다 슬몃 눈 감고 싶은
걷다 보면 물소리에 젖은 길 헝클어져서
가던 길을 아주 잊고 싶은 곳
모처럼 찌든 귀 씻고 눈 씻고
온갖 생각까지 헹구는 새벽 산책길
이 길 다 가고 나면 어디로?
그대에게 가는 길은 미로 같아서
가끔씩 몸은 두고 마음만 가네.
♣ 詩 들여다보기
탄생으로부터 유년기를 거쳐서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이르는 장대한 과정을 지나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의 긴 여행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길을 따라가며 여행하는 인간의 운명은 길 위에서 시작하여 길 위에서 끝을 맺는다. 길은 공간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인 의미도 아울러 갖는다. 길은 어느 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의 지향이면서 지침, 목적 그리고 방법과 수단 등 여러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여행이 지향하는 길의 의미와 상징들은 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포괄적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여러 작품 속에서 경험해 오고 있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차원에서 길은 인간의 삶이나 운명의 행로를 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길은 인간 삶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으로 쓰인다. 그 점에서 보면 임영조 시인은 아직도 길을 따라서 여행 중에 있는 시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유명을 달리 하여 저 세상에 가 있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끊임 없이 여행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여행의 방식으로 길을 향하는 예술적 속성은 문학에서 떠남의 모티프와 탐색과정으로 나타난다. 고전문학에서 발견되는 기아모티프도 실은 여행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상징하는 것일 터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탐구를 지향하는 인간의 운명은 다른 곳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깨닫고자 한다. 그러므로 떠남을 기본으로 하는 여행도 사실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떠나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떠남과 돌아옴의 반복과 어우러짐은 곧 우리 생의 전체로 확장되면서 진정한 떠남과 돌아옴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자신만의 상징적 공간을 갖고 싶은 것이 여행의 목적이며,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 여행을 테마로 한 문학적 가치일 것이다.
시인들은 여행을 자주 한다. 그것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소재를 구하기 위한 차원이거나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 하는 여행이다. 임영조(1943~2003) 시인도 생전에는 많은 여행을 통해서 그 경험을 시로 형상화하였으며, 지금은 죽음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여행체험을 배경으로 살아생전에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는 시집도 낸 바 있다. 그는 지도에도 없는, 자신만이 아는 섬이 있다고 하였다.
여행이란 우리가 머무는 곳과는 모든 면에서 색다른 곳을 찾아가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같은 공간일지라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 있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발 딛고 있는 공간이 새로운 곳으로 인식되면서 그것의 색다른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것은 공간이동보다도 더 중요한 여행의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우리 인간은 여행을 위해 언제나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살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여행의 의미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공간조차도 여행의 의미로 바라다 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하루하루 우리가 집을 나섰다가 저녁이면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은 바로 순간순간을 여행하는 자의 성실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임영조 시인은 그의 이른 죽음을 예상하고 하루라도 빨리 그가 머무는 이 지상의 다양한 곳을 찾아보기 위한 일환으로 여행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생 후반기에 보여주었던 다양한 여행의 과정들은 그가 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 함께 하고 싶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일상의 순간을 벗어나서 색다른 공간적 의미를 확인하려 하는 여행의 의미란 기실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가장 절실한 의미 부여이자 가치추구라는 점이며,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여행의 진정한 가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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