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벙어리장갑 / 오탁번

낙동강 파수꾼 2020. 9. 7. 10:01

 

벙어리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 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꼽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 「벙어리장갑」, 문학사상사, 2002 ; 「오탁번 시선집」, 태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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