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계절마다 가지가지로 변하는 벽화
는 없을 것이다. 전등을 죽여도 해와 달과 별들이 창에 끓어올라 상심하지 않
다. 당신이 날씨를 살피며 기다리던 사람이 오후의 길을 오는 것이 보이는 나
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느뇨. 암만하여도 나는 그
순수한 투명이 좋은가 보다. 아지랭이를 따라 꽃에서 꽃으로 날으는 나비의 기
쁨도, 책상 너머 바깥에서 오랫동안 더위를 씻어주던 녹음(綠陰)이 낙엽지는
고요도, 잘 익은 과실나무 아래서 생각하던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도, 다 그대
로 전하여주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둠을 차별하지 않기에
한 쌍의 제비가 단꿈 꾸는 그믐밤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유리창과 나를 분리
할 수는 없다. 눈보라 칠 때 유리는 추위가 방안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
건만 방안의 나는 젊은 소경이 피리를 삐이삐이 불며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듣
는 나를 슬퍼한다. 그러나 유리창이 맑음을 잃고 추위에 복잡한 꽃무늬로 동결
(凍結)한 모양이 내 아름다운 슬픔의 형상임을 보기도 한다.
* <시>, 조광출판사, 1976 ; <김구용 문학 전집>, 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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