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詩 들여다보기
우리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할 때 잘 표현하고 싶어 조심스러워진다. 어떻게 해야 알아줄까, 어떻게 해야 잘 전달될까 고민한다. 표현 방법에 따라 말과 글이 있는데, 말보다 글이 더욱 효과적이다. 말은 한 번 뿌리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민들레 씨를 후- 불면 잡을 수 없듯이 일회적이다. 반면 글은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음 속으로 정리해서 고민한 후 완성되어 전달된다. 몇 번이나 읽어보며 되뇔 수 있다. 특히 정갈한 글씨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는 보낸 이의 마음이 더욱 잘 읽힌다. 겉봉에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기까지의 설렘과 날마다 우편함을 열어보는 기다림이 있다.
요즘엔 편지 쓰는 일이 드물어졌다. 우체통 대신 정보통신을 이용하고, 핸드폰으로 연락을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의 여운으로 배달되는 우표 대신 금방 전송되는 전자메일 주소로 기다림이나 설렘이 줄어들었다. 가끔 누군가에게 손 쉬운 문자메시지나 메일보다는 친필로 쓴 편지 한 통 보낸다면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마음에만 가득 써놓고 보내지 못한 편지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시인은 독백적 진술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으려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코 넋두리가 아니다. 과장도 없다. 그냥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쓸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죽음을 통해서든, 아픔을 통해서든 이별을 한다. 그래도 사랑을 한다. 그래서 아프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다. 시인의 "편지"는 역설적이다. 단순히 연애시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매일 편지를" 쓰지만 사람들이 그 편지를 "구겨 버"리고 "밟아버"리고 "비행기를 접어 / 날"리는 것이 아닌, 편지를 쓴 '그' 자신이 '여자'에게 전하지 못하고 쓴 즉시 버린 것이다.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지만 잊지 못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별'에 가장 가까운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별'만은 아닌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도발적이고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새로움을 준다. 독백의 진술이지만, 자아가 둘이다. 그 둘이 어울려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결정적으로" 오늘 편지를 쓴다 하더라도 그 편지는 며칠 후 의 소식이 된다. 그래서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만하며, "잘 있지 말아요 / 그리운······"과 같은 이질적 표현이 통한다. 역설적인 어조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더욱 속도감 있게 그리움을 심어 준다. 독백이지만 의식 내부에는 두 자아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리운 당신에게 잘 있지 말라는 건 말 그대로 말 뿐이다. '그'는 간절하다. 쉬지 않고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버리기를 반복한다. 글자는 같지만, 처음의 "안녕"이 끝날 때의 "안녕"과 다르다는 걸 안다. 결국엔 인정하기 싫은 이별을 인정해야 하니 얼마나 억울한가. "당신을 만나"서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편지 전해 줄 방법은 무수히 많아도 당신을 만날 수 없듯이, 이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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