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오규원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 詩 들여다보기
새벽강으로 안개가 흐른다. 강물도 아닌 것이 강물처럼 흐른다. 가볍게 살랑이는 기류의 불안함. 희미하게, 다만 희미하게 어둠이 깔리면 흔들리는 작은 침묵만 남겨진다. 안개로 자욱한 강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시가 있다. 릴케에게 인정을 받아 시인이 된 헤르만 헤세는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 모두가 다 혼자다"라고 표현했다. 흐릿한 안개는 음영 짙은 하늘을 삼켜버렸고 과거가 지나버리듯, 기억은 사라지고 안개가 그 자리를 채운다.
안개는 한 없이, 한 없는 그리움으로 향한다. 끝나지도, 잊을 수도 없는 그리움으로 향하게 만들어준다. 이별했다 다시 사랑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안개 혼자만 만물과 연애 중이다. 모든 도구와 표현의 접촉은 다르지만 시간에 지배 받는 안개 속은 막막하게 가려진 미로 같다. 안개가 짙을수록 갈 길은 지워져 기억에서조차 그 대상과 멀어진다. 이별이 쉽다. 안개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잊기도 쉽다. 안개 속에서는 모두가 혼자다. 서로가 서로를 지우며 모두가 혼자다.
이별의 후유증은 어지럽다. 무수한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머리가 가끔 무겁고 현기증이 날 때도 있다. 헤어져 비로소 사랑도 알게 되지만, 이별을 고하고 모두 이미지만 남긴 채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무겁고, 우울한 기억은 잡을 수도 없는 무슨 꿈 같던 환상은 아니었을까. 무엇 하나 남겨짐이 없을지라도 때론 이별의 속성이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기록일 수 있다. 기록되기 위해 사랑은 시작된다. 본질은 남고 허위는 버려지는 것이다. 안개가 사라지면 사랑은 다시 또 깊게 시작된다. 맑고 깨끗하게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기억을 담아 무엇 하나 생각할 수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마음으로 흘러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우리, 보여도 보이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은 그러하다.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까움을 두려워한다. 안개가 평생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간격을 두고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시인은 안개를 통해 사라지고 지워질 수 있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강의 물을 따라가며" 일었던 안개 속에 "강이 사라"지고, "돌들까지" 사라지고, "망초를 지우"고, 이제는 "나의 하체"까지 지웠다. 하체 없이 상체가 "허공에 떠 있"다.
더욱 두렵고 외로운 것은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만지는 것이다. 상체와 하체는 이별한 상태인데 형체까지도 잃어버린 손과 하체는 서로를 감지할 수 있을까. 지워지고 사라지는 경계, 서서히 소멸되는 불안감에 외롭다. 안개가 모두를 덮고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주변이 보이지 않고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나를 지켜내는 일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안개가 거두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몸짓으로 "툭툭" 쳐야 한다. 두 손과 하체가 지워져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더라도 "툭툭 소리를" 내며 어딘가를 돌아서 나에게 당도할 것이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이별로 인한 상처도 능동적인 마음으로 대처한다면 따뜻하게 이겨낼 수 있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시인이 의식을 잃기 직전에 제자 손바닥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이다. 의식이 있는 마지막까지도 시를 썼으며, 정말 나무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시가 삶 그 자체였고 삶이 곧 시였다. 시인은 나무 속에 잠들어 있는 지금도 투명하게 존재하며 자연과 함께 두두물물의 시를 쓰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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