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11)
101
시의 첫 구절에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해요,
전에 나훈아 기자 회견 하는 것 보셨지요.
도입부에서 분위기를 딱 장악하잖아요.
그 안에 글쓰기의 기술이 다 들어 있어요.
밀고 당기다가, 뒤에 가서 확 뒤집고, 감동으로 끝내기.
'기승전결, 할 때, '결(結)' 자에는
실 사(絲) 변이 들어 있지요.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반드시 홀쳐매야 해요.
102
시는 드리블이에요.
전적으로 말을 몰아가는 거지요.
관념의 방어막을 뚫고
'무의미'의 골대 안으로 말을 차 넣는 거지요.
독자들은 드리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103
우리는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잘 몰라요.
상식과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하는데,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요.
대상 스스로가 벗는 거지,
내가 대상을 벗기는 게 아니에요.
글쓰기는 '나'를 파괴하는 거예요.
칼끝을 자기에게 닿게 하세요.
독자는 작가가 피 흘리기를 바라요.
복싱경기 보러 갔는데, 두 선수가 실실 웃으며
사이좋게 싸운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피 안 흘리면서, 흘리는 것처럼 사기 치는 걸
독자는 제일 싫어해요.
독자를 속일 수는 없어요.
104
눈은 송이송이 우리 옷에 내려앉지만
한참 맞고 나면 옷이 젖잖아요.
그렇다고, 이왕 녹을 거, 아예 물로 내리면 재미없지요.
시의 언어도 눈송이 같아야 해요.
시를 읽고 나면 독자의 어딘가가 젖어 있어야 해요.
105
오만한 독자에게 칼을
어디로 들이댈지 생각해보세요.
독자는 거의 애들 수준이에요.
조금만 지루해도 딴짓을 하게 돼 있어요.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지루하게 해서는 안 돼요.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전부 다 잘 써버리니까 오히려 긴장이 풀어져요.
독자는 우리 머리 꼭대기에 앉아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다 보고 있어요.
106
시는 농담 따먹기 구조로 되어 있지만
독자를 훑고 지나갈 때는 몸서리치게 해야 해요.
가장 아름다운 시는
실성한 사람들의 헛소리를 닮아 있어요.
사람 죽으면 관(棺) 짜서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흙 떨어뜨리는 느낌,
그 느낌이 시에 내려올 수만 있다면......
그럼 다 된 거예요.
107
우리는 대상 자체를 만날 수 없어요.
대상에 대한 관념을 만날 뿐이지요.
예술은 대상에 '기스'를 내어
그 내부를 들여다보게 해줘요.
땅에서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듯
우리가 넘어지는 곳도 언어이고,
짚고 일어나는 곳도 언어예요.
108
저번에 같이 보았던 사막 사진의
검은 구멍들 생각나시지요.
글쓰기는 그런 구멍들을 그려 넣어주는 거예요.
구멍은 내 속에 있지만 나는 아니지요.
그림자처럼, 발자국처럼
'부재'로서 존재하는 것들.
아주 가까이 있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것들에게
말을 걸어주어야 해요.
그런 것들의 우여곡절을 만들고, 들어주는 거예요.
109
무엇보다 '시적인 것'이 숨어 있는 구멍을 잘 찾아야
해요.
귓구멍으로 백날 냄새 맡아봐도 맡아지지 않잖아요.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넘어갈 때도,
반드시 시의 구멍을 통과해야 해요.
실패하더라도, 계속 시의 구멍 앞에 서 있어야 해요.
번번이 힘들 거예요.
그렇지만 귀한 건 다 어렵게 얻어져요.
110
두께가 없는 종이 한 장도
다른 종이 한 장과 겹쳐주면 부피가 생겨나지요.
평면은 세상에 널려 있어요.
부피를 만들어주는 게 시인의 할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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