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10)
91
시와 산문의 차이는
피아노와 실로폰의 차이예요.
피아노는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지만,
실로폰은 일일이 때려주어야 하잖아요.
강약을 조절하는 데도 차이가 있어요.
피아노는 페달을 밟아야 하지만
실로폰은 일일이 팔힘으로 조절해야 해요.
시 쓸 때 그 차이를 느껴보세요.
92
말을 적게 하면 있어 보여요.
말을 다 해버리면 없어 보이는 거예요.
돈 받으러 가서 주머니에 손 넣고
조몰락거리면 겁먹어요, 칼이 든 줄 알고......
있어 보이려면 딴소리하지 말아야 해요.
그냥 "잘 지내시지요. 식사는 잘하시고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이에요.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거지요.
93
정현종 시인의 '견딜 수 없네'
'어디 좀 가 있다가' 이런 제목들 참 좋지요.
한 번 물면 대가리가 끊어지도록
안 놓는다는 게 이런 표현일 거예요.
안전벨트 매어놓으면,
일부러 풀기 전에는 절대 안 풀리지요.
그런 식으로 꽉 물고 안 놓는 구절이 있어야 해요.
다음 주에 써 오실 시의 첫 행은
'왜 그렇게 안 살아? 내가 원하는데......'
94
결혼할 때,
아파트 바로 옆집 사람이랑 해서 되겠어요.
말도 너무 가까이 붙이면 재미 없어요.
그렇다고 외국 사람이랑 하는 것도 거북하고......
말을 너무 멀리 띄워도 안 된다는 얘기예요.
윷놀이 할 때 지름길 놔두고,
가장자리로 한 바퀴 돌고 나면 맥빠지지요.
말을 겅중겅중 건너뛰되
정확하게 연결하세요.
자, 그렇게 해서 붙여올 글의 첫머리는
'아침이 됐다고 지난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95
우리 다들 결혼할 때
뭐 있었어요.
살림하면서 모은 돈 불려
집도 사고 차도 샀지요.
시도 그렇게 쓰는 거예요.
'말'을 잘 굴리세요.
그 속에 다 있어요.
다음에 붙여 오실 글은 뭐가 좋을까......
'왜 그땐 몰랐을까?'로 시작하고,
'봄에 내리는 눈'을 연상하세요.
96
착실하게 한 행 한 행 붙여가는
연습이 제일 중요해요.
고스톱 칠 때, 손에 든 거 한 장 내놓고
바닥의 것 들칠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 설렘으로 다음 행을 이어주세요.
다음 시간까지 '붙여 쓰기' 해올 첫 줄은
'오늘 밤은 안 돼.'
무슨 얘기가 나올지 저도 궁금해요.
97
첫째, 재미있게 얘기하기.
둘째, 행과 행 사이 벌려주기.
셋째, 절대 산문으로는 안 가기.
사실 셋 다 같은 얘기예요.
개그라도 좋으니까
제발 재미있게 써보세요.
생생하게 뉘앙스를 살려
써 올 첫 구절은
'이런 건 별로 안 좋거든?'
98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닿으려고 해야 해요.
쓰다가 막히면
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등산할 때, 길 잃으면
출발한 데로 되돌아가듯이......
소주 두 잔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다음에 써 오실 구절은
'다시 울 일이 없다.'
99
각각의 제목에 다른 단어 하나씩을
연결시켜 보세요.
그냥 감각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그러면 생각이 제멋대로 뻗어나가고
말이 말을 따라가게 될 거예요.
이렇게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하면
어떤 공이 와도 칠 수 있는 타자(打者),
어떤 배역을 줘도 소화하는 배우가 될 수 있어요.
다음 주까지 써 올 시의 첫 줄은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100
시는 절대적으로 말하는 방식에 있어요.
시답잖게 써나가다가
확 낚아채는 구절이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시리한' 말장난밖에 안 돼요.
그럴 바엔 삭발하는 게 나아요.
올해 안으로 뭐라도 안 되면,
다 같이 삭발하겠습니다. (웃음)
12월 24일 오후 5시까지 제 이메일로
시 한 편 '붙여 쓰기' 해서 보내세요.
이날 자정 안으로 답장 없으면,
자발적으로 삭발하세요. (웃음)
써 오실 시의 첫 줄은
'내 입이 조금씩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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