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전에, 나는
여느 때와 다르게
공기가 부풀어오르고
담장이 유리빛으로 빛나고
들녘의 잡초들이 바람에 날렸다
어떤 관목숲으로도 서 있지 못하는
새들이 하늘과 물 속으로 갈앉았다
지상엔 지나간 시간의 상처뿐
십일 월의 그림자들이 다도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잎 푸른 가지 속으로 들어가
내가 시름을 나눌 수 있는 의자와 책들 사물들
아직도 불켜 있는 스탠드와 불안하기는 하지만
서쪽으로 열려진 창문들
바람은 언제나 나직이 흘러갔지
풀숲들이 나직이 속삭였지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
네 속에서 편안히 잠을
그러나 잠은 꿈일 뿐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멀리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나무와 돌 사이
언덕과 구렁 사이 죄와 벌이 서성거리고
나는 잘려진 도마뱀처럼, 시간들을 진행형으로
떠올리지 못하고 토막토막, 나누어 이해했다
엉클어진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
유리창을 깨트리고, 오오, 말하기 전에, 나는,
이대토록 상처투성인지 몰랐다
나는 말에게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말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나무들을 비추고 이파리들을 비추었다
어떤 확신의 말도 나는 할 수 없다
파충류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 들린다
*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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