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물결에 대해서 / 허만하

낙동강 파수꾼 2020. 4. 15. 18:16

 

물결에 대해서

 

 

 

1

 

   총을 맞고 왈칵 거꾸러지는  돌격대 병사의 마지막 몸짓을 생각나게 하지만

물결은 한여름 밤하늘을 흘러내리는 불꽃같이 몸의 중심부에서 터지는 것이다.

육체의 균형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외줄 위에 서 있는 곡예사가 하늘 높이에서

노려보는 한계를 물결은 시시각각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까마귀가 날고 있는

더운 밀밭을 짓누르고 잇는 검푸른 하늘이 오히려 고요한 것은 벌써 아슬아슬

한 파국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터질 것 같

은 고요를 안으로 견디고 있는 물결.

 

 

2

 

   무너지기 위하여 물결은 몸을 안으로 말아올리며 힘껏 솟아오르나 붕괴 직전

잠시 숨을 죽이는 순간을 가진다. 높이뛰기 선수가 뛰어오른 하늘에서 잠시 머

무는 것과 같다. 고갯길 정상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풍경을 전망하는 나그네 눈

길을 스치는 햇빛 한 올같이 짧은 한순간의 망설임.  살을 안으로 말아올리는

연속 동작은 수면에 떠오르는 가오리 가슴지느러미 너울거림같이 부드럽다. 절

정에 이른 물결에 임의의 점을 설정하고 그 점을 이으면 물은 빠져나가고 아름

답게 휘어진 곡선만이 뒤에 남는다.

 

 

3

 

   유적을 부는 바람처럼 물결은 몸짓으로만 있다. 아테네의 유적 같으나 붕괴

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다. 물결은 풍화하지 않는다.  목숨의 흔적이 없는 지구

에 처음으로 연두색 바다가 태어나던 눈부신 순간부터 태어남과 사라짐을 되풀

이하고 있는 물결. 처음 만나는 군청색 지중해 해안에서 어디서 한 번 본 얼굴

같은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길에서 잃어버린 자기 얼굴을 물결의 몸짓에 비추

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생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목숨의 쓸

쓸함.

 

*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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