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벼랑 - 詩 들여다보기

접시꽃 당신 / 도종환

낙동강 파수꾼 2021. 5. 9. 22:09

 

접시꽃 당신  /  도종환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詩 들여다보기

 

   이 시는 1986년에 발간된 「접시꽃 당신」의 표제작의 일부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스트셀러로 시집이 부상하게 되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시집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던 1980년대의 정서와 아울러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이 언제 사랑을 노래한 데서 한 치라도 벗어난 적이 있었으며, 또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랑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점을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 이 시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을 두고 누군들 아파하지 않을 자 있는가. 그 누구라도 사랑스런 한 사람의 생명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다면 '순애보'를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시는 거기에서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사랑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 다시 큰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면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사랑하던 한 사람이 죽은 뒤에 따라서 죽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생의 의지를 포기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다 가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앞서 떠난 사람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떠난 사람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사별 후 인간이기에 겪게되는 갈등과 절망감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을 넘어서는 데서 사랑의 위대함은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도종환 시인도 사랑하던 사람의 떠남을 처음에는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표현하였다. 그러기에 시인은 절망의 나락으로 떠밀리면서 몸부림 쳤으리라. 어쩌면 자신도 따라서 죽으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끝내 그 절망의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두레박을 새로운 생의 긍정적 세계로 들이부으면서 참다운 사랑의 고귀한 의미를 깨닫는다.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 뿌듯이 주고 갑시다"라는 표현은, 한계상황에 다다른 시인이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의 극적인 전환을 통해 도달한 단계에서 발휘되는 놀라운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 어느 누가 있어 이 놀라운 사랑 앞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신발을 벗고 강에 투신해 죽음으로 뒤따라 간 자들이여, 이제 다시 깨어나라. 그리하여 앞서 간 이의 염원에 귀기울여 보라.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먼저 간 사람이 남긴 크나큰 슬픔이 역설적으로 남은 자의 생을 밀고 나아가게 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사랑의 힘이다. 참다운 사랑의 힘은 이렇게 위대하다. 나의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의 수많은 고통에 대해 눈 뜨게 되는 시인의 의지 앞에 우리는 고개 숙인다.

   아, 그래서 백석 시인도 말한 것인가. 인간의 삶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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