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작
새벽에 논부는 밭을 간다.
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
밭고랑에 넘어진다.
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를 꺼내
벌판에 펼쳐놓고
힘껏 갈아가는 농부
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
밭을 간다.
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
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
아이의 눈 속에 핀
새소리를 갈고.
그가 갈아온 밭고랑에
고인 눈물
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
일생을 갈고 와 이제
황혼의 발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
찢긴 밭고랑에 핏빛으로 타는 놀
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 「몸은 지상에 있어도」, 시인사, 1979 ; 「이성선 시전집」, 시와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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