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시인의 詩作法 (5-4)
11.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는 '쓴다'가 아니라 '받아낸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시는 늘 온다. 길을 가다가도 오고, 잠결에도 오고, 밥을 먹을 때도 온다. 하지만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는 오다가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구에서 투수가 직구를 던지고 싶은 마음으로 공을 던졌는데, 평소에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공이 가는 것과 매한가지다. 생각과 손이 따로 노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경우도 똑같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쓰려고 했는데도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이상하게 써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볼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계속 공을 던지는 연습을 통해 내가 직구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직구를 던질 수 있게, 커브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커브를, 슬라이더를, 포크볼을 던질 수 있게끔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공이 엉뚱한 곳으로 던져지듯 제대로 써낼 수가 없다. 포수가 새를 발견했다고 치자. 꿩을 잡기 위해서는 항상 총알이 장전되어 있어야 한다. 꿩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꿩을 발견하고 어, 꿩이네!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그 사이 꿩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꿩을 발견하면 바로 겨냥해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적인 상태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한다.
< 내 시의 적(敵)은 나 >
나는 시를 쓴다기보다는 받아낸다는 생각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시를 수신하는 일종의 안테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마치 라디오나 TV의 수신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으면 음악이 잘 들리거나 영상이 보이고,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칙칙거리고 영상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다.
나는 우주의 어떤 영혼이 나를 택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안테나, 즉 수신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나에게 머물 필요성을 잃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나는,
나를 찾아온 고귀한 영혼들을 잘 모셔야 하며, 그 방법은 내 의식의 집을 소중히 다루고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어떤 영혼들로 인해 자신이 충만해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상태가 되면 시가 써지고, 그렇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 너무도 정확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떤 거짓과 타락으로 마음이 망가져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나는 몇날 며칠 반성을 하며, 시혼을 다시 부른다.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을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을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 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한 달 새
가는 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 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 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주말연속극 / 고영민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
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
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
대밭, 장독대 뒤 켠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라고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라고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
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하고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
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
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저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
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라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
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 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
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연속극.
12. 시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시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다들 누군가를 좋아하여 꼬시기도 하고 꼬심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애인(詩)을 만들려면 먼저 좋아하는 이상형을 찾아야 한다. 이상형을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그리워해야 한다. 자기 전에도 떠올려보고, 밥을 먹다가도 빙그레 웃으며 떠올리고 길을 걷다가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리워만 한다고 애인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엔 조금씩 접촉을 해야 한다.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알아내고, 어느 길로 가는지를 알아내고, 우연을 가장한 채 만나기도 하고, 밤늦도록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기도 해야 한다. 한번 두번, 접촉하면서 안면도 서로 트고, 인사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상대도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예쁘게 단장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옷장을 뒤져 좋은 옷을 골라 입도록 해라. 그러면 상대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다음엔 조금씩 유혹을 해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선물공세도 하고, 당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라. 그 다음 적당한 때를 골라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라. 몸도 주고 마음도 줘라. 서로 옷을 벗고 불 끄고 뜨겁게 하나가 되라. 그러면 생명이 탄생한다. 그 생명이 詩다.
세상엔 공짜로 얻어지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 되는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는가? 하나 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관심 - 정성 - 신뢰 - 사랑 - 하나" 즉 관심을 가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보이는 것에 정성을 드리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생명이 탄생한다. 남녀 관계도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갖지 않고 정성도 드리지 않고, 신뢰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글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사랑 후에 아이가 생기는 것과 같다.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 고영민
그동안 저 가지를 지그시 물고 있던 것은
모과의 입이었을까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나무는 저 노랗고 둥근 입속에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부드러운 혀였을까
입김이었을까
가진 것 없이 매달린 내가
너에게 오래오래 가닿는 길은
축축하고 무른 땅에 떨어져 박히는 것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거부해도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다시 혀를 밀어넣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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