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 / 이승훈

낙동강 파수꾼 2020. 7. 25. 19:31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

 

 

이승훈 씨는 바바리를 걸치고 흐린 봄날

서초동 진흥아파트에 사는 시인 이승훈 씨를

찾아간다 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벨을 누른다

이승훈 씨가 문을 열어준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아니 어쩐 일이오? 이승훈 씨가

놀라 묻는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지요 그래요?

전화라도 하시지 않고 아무튼 들어오시오

이승훈 씨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이승훈 씨를

안내한다 이승훈 씨는 그의 방에서 시를 쓰던

중이었다 이승훈 씨가 말한다 당신이 쓰던 시나

봅시다 이승훈 씨는 원고지 뒷장에 샤프 펜슬로

흐리게 갈겨 쓴 시를 보여준다 갈매기, 모래,

벽돌이라고 씌어 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오?

이승훈 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승훈 씨에게

묻는다 갈매기는 강박관념이고 모래는 환상이고

벽돌은 꿈이지요 뭐요?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어요 갈매기는 모래고 모래는

벽돌이고 벽돌이 갈매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바다는 갈매기가 아닙니다 그건 모래가

벽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벽돌은 바다가

아니니까요 바바리를 걸친 이승훈 씨와 작업복을

입은 이승훈 씨가 계속 싸운다 마침내 화가 난

이승훈 씨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좋아요 좋아! 문을 쾅 닫고 사라진다

 

* 「밝은 방」, 고려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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