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바람 속에서 / 정한모

낙동강 파수꾼 2020. 4. 27. 19:12

 

바람 속에서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장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한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앉힌다

 

 

 

2. 남루한 기폭

 

 

   바람은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

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

어났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 속에서 빠져나온 다람

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 같

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 하나의 방향과 하나

의 의지만을 생명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 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

에선 갈대잎소리로 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

진 벽을 지나 무너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면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彈道)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지평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

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정한 것으로 하여 깨어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는 그런 바

람 속에서만 너는 있어라

 

* <카오스의 사족>, 범조사, 1958 ;  <정한모 시선집>, 포엠토피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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