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벼랑 - 詩 들여다보기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낙동강 파수꾼 2021. 11. 12. 11:19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을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 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가지를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 詩 들여다보기  

 

   뻘에 가 본 적이 있다. 발이 푹신하게 빠지는 뻘에 들어가 맛조개를 캐느라 시간을 다 보낸 적이 있다. 팔자 모양의 구멍을 찾아 맛소금을 넣으면 꾸르르르 거품을 뱉으며 올라오는 혀. 잽싸게 낚아채야 한다. 혀를 따라 올라오는 물렁한 살. 맛조개는 난생 처음으로 만나는 뻘 밖이 낯설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의 당황함을 느낄 수는 있다. 폭신한 자신의 침실에서 생소한 곳으로 뽑혀온 맛조개.

   물때가 오면 쫓기듯 뻘을 벗어나야 한다. 물이 차오르는 건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독식자처럼 뻘을 헤집고 다니던 사람들이 반대로 물에, 그 혀에 먹힐 수도 있다. 육지로 돌아와 물에 잠긴 뻘을 바라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조금 전까지 발바닥을 간질이던 그 땅이 맞나. 바다와 땅의 신비한 교집합.

   함민복 시인의 「뻘에 말뚝을 박는 법」을 읽으니 혼인이 떠오른다. 연지 곤지 찍은 새색시의 옷고름을 푸는 신랑의 뭉뚝한 손. 문에 구멍을 뚫어 엿보려는 동네 사람들. 서서히 뻘에 들어가는 말뚝. 그러나 쉽지 않다. 낯선 말뚝이 쉽게 뻘에 들어갈 순 없다.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을 빨아들일 때까지" 애써야 한다. 그러다가 말뚝이 박히면 다음부터는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좀 더 쉽게 말뚝은 뻘에 가 박힌다.

   우리 어머니들의 혼인을 생각해 본다. 마음을 여는 것도 몸을 여는 것도 금기였을 시대에 남녀는 애초에 불평등한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 음과 양의 조화, 그 가운데 생명이 잉태되고 세월이 가는 것이지만 여성의 몸은 닳는다. 닳는다는 말이 불편하지만 닳는다는 표현 말고 달리 적당한 말이 없다.

   물고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나면 말뚝은 자리를 옮겨 박힐 수 있지만 뻘은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 뱃속에 생명을 키우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행가 가사를 보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 여성의 기다림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지 보인다.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는 노래가사를 보면, 배처럼 항구에 드나드는 남성의 자유로움에 대비되어 항구처럼 배를 기다리는 여성의 기다림이 드러나고 있다. 타임머신이 나올까 말까 한 이 21세기에. 

   그러나 신파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어디 여성 뿐인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상황이 역전된다. 뱀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저승길을 자초했던 오르페우스. 그의 연주에 감동 받은 하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려주기까지 그가 가졌던 순애보적인 마음을 생각해 보면 사랑이 위대하다는 진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뮤직비디오 같은 이야기는 고전에서나 가능한 듯 보인다. 요즘 티비에서 방송되는 케이블 프로그램을 보면 상식과 윤리를 넘어선 부부들이 등장한다. 믿음과 사랑이 깨져 증오만 남은 그들을 보면 정말 한 때라도 사랑했던 사람들인가 의심이 든다.

   누가 뻘이 되고 말뚝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사이. 그것이 부부이고, 결혼이다.

   뻘에 나가, 그 물컹한 살을 맨발로 밟으며 정신 없이 조개를 잡았던 기억. 뻘은 아픈 기색 없이 제 살을 내주었다. 누구나 누구에게든 뻘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켐페인 같은 얘기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부드러워진다면 부부가 아닌 타인들도 조금 더 살기가 편해질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