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실리데 / 정진규
몸이 실리데 / 정진규
大餘선생은 <여보>라는 소리에는 勾配*가 있다
고 들었다 왜 그렇게 들었을까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썼을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어떻게 읽느냐
고? 조급하긴 기다리시지, 좀 더 기다리는 동안이
그게 바로 勾配야 그게 바로 詩야 그래서 勾配라
고 썼을까 정말 기다리다 보니 이 몸이 그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데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길이
아득히 놓여지데 위 쪽에서 보면 아래 쪽으로 기
울어지고 아래 쪽에서 보면 위 쪽으로 기울어지데
무게가 실리데 몸이 실리데 바다-해 봐, 벌써 너는
바다 쪽으로 기울고 있어 기차를 타지 않고서도 벌
써 바다에 가 있어 내가 너를 오르내린 것이 벌써
몇 해째야 여보, 당신을 부르는 나의 勾配가 벌써
몇 해째야 우리들을 配匹이라고도 부르잖아 우리
들은 서로 기울어지는 짝이 아닌감
♣ 詩 들여다보기
사랑은 때로 상처로 온다. 상처가 우릴 아프게 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음에 있다. 필드를 가로지르는 속공처럼 '어느새'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상처는 오비(Out of Bounds)와 같다. 그것은 이미 사랑의 구역을 넘어선다. 한 사람의 아픔은 곧 모든 사람의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상처를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모두 쓰라린 것, 그것을 상처의 연대라 말하면 어떨까.
무서운 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사랑에 있다는 점이다. 사랑, 상처,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은, 사랑이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 사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합'을 구하는 사랑은 끊임 없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려 한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길 바라는 것은 서로의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그때부터 사랑의 모든 공식은 감옥이 되어버린다.
자유롭게, 편안하게 때론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선 사랑과 사랑 사이에 상처를 집어넣을 수 있는 틈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관계가 곧 틈이다. 우리는 틈 안에서 다시 사랑이 오기를, 너를 이해하기를 기다린다. 나를 버리고 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틈이 되는 것이다. 틈은 부부 사이에 더욱 중요하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기 위해선 어쨌거나 버텨야 한다. 사랑을 버티고, 상처를 버티는 것. 틈, 관계, 그리고 구배다.
'대여'는 김춘수 시인의 호다. 그는 「제1번 비가」에서 "여보, 하는 소리에는 / 서열이 없다 / 서열보다 더 아련하고 더 그윽한 / 勾配가 있다"고 말했다. 부부 사이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 다시 말해 부부는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아련하고 그윽한 정서적 관계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구배가 기울기와 같은 말이라 할 때, 부부관계는 정서적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반면 정진규 시인은 구배를 "이 몸이 그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몸이 기운다는 것은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말한다.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니 몸이 기울고, 몸이 기울다 보니 아내는 바다로 기울고 있었다. 여자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
정진규 시인의 몸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김춘수 시인의 "서열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내려가지도 않는다.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길"을 내가 오르기도 하고 때론 네가 오르기도 하면서 너와 나 사이의 서열은 깨진다. 어디 몸 뿐이랴.
시인이 언젠가 "몸은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의 기울임이 바다의 기울임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그렇다. 육체를 통해 생명이 탄생한다. 이제 몸은 정신과 견주어 보잘것 없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리의 몸짓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몸이 보여주는 우주의 은유적 확장이다. 몸은 세계로 기울고 세계는 다시 몸으로 기운다. 이제 몸과 세계는 경계를 짓지 않는다. 세계가 다 살이다.
사랑과 결혼은 다르다. 결혼 없는 사랑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지만, 사랑 없는 결혼은 허상이고 허위이자 껍데기다. 너와 나의 관계가 껍데기가 되는 순간 마음은 곪기 시작한다. 정진규 시인이 말하는 부부 사이는 몸과 마음, 그리고 세계와 우주가 기우는 관계다. 둘로 나누어졌던 것들은 이제 경계를 허물어 결합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합 사이에는 구배가 있다. 틈이다. 너와 내가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동안 사랑의 상처는 아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말하자면 부부는 몸으로 만나고 더불어 마음으로 만난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다. 이제 시인이 말하는 몸이 기우는 사랑은 바로 초육체적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