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13) / 이성복
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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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물수제비뜨는 거예요.
언어라는 수면(水面) 앞에 한껏 몸을 낮추는 거지요.
시는 절대적으로 듣는 방식이에요.
대상이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내 얘기를 하지 말고, 대상의 얘기를 하세요.
의미는 숨기고, 말의 감촉을 느끼도록 하세요.
언어에서 언어로 건너뛰다 보면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동질적인 재료로 동질적인 판을 짜세요.
만두피처럼 단단히 붙여야 해요.
122
시골에서 새끼 꼬는 것 보셨지요.
일단 두 발로 꽉 잡고 손으로 비틀지요.
잉크병 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비틀잖아요.
그처럼, 대상을 고정시킨 뒤에
의미를 비틀어야 해요.
머릿속 생각은 다 똥이니까 버리세요.
말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그 사이에 태어나는 의미를 살펴봐야 해요.
123
시가 얘기하려는 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볼 수 없는 것,
묻기 전에는 알았는데, 물어보면 모르게 되는 것,
말하는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에요.
시는 직접적으로 얘기 안 해요.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옆의 것을 말하지요.
「소염시(小艶詩)」의 구절이에요.
빈호소옥원무사(頻呼小玉元無事)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무슨 일 있어서가 아니네.
다만 낭군이 제 소리를 알아듣게 하려는 것뿐.
이런 게 전형적인 시의 방식이에요.
124
제가 왜 동시(童詩)로 가지 말라 하냐면,
동시엔 고통이 없기 때문이에요.
항상 자기 자신과 대상을 고통 쪽으로 가져가세요.
시는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당신 뜻대로 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주소서."
그처럼 시는 자기를 불리하게 하는 거예요.
오직 무력함으로써만 힘을 가질 수 있는 게 시예요.
125
손등이 까졌을 때
공기 중에서는 아픈지 모르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따갑지요.
특히 소금물에 넣으면 더 쓰리지요.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게 쓰린 거예요.
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호기심이라면
시에서 나오는 출구는 쓰라림이에요.
126
삶이란 참 속절없는 거지요.
그 때문에 시가 속절없는 거예요.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태어나는 것, 밥 먹는 것, 연애하는 것,
오줌 누는 것, 꽃 피는 것, 머리카락 자라는 것,
모두가 속절없는 것들이에요.
「사철가」라는 노래 아시지요.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살아 있는 모두가 덧없고 뼈마디 시리다는 걸 잊지 마
세요.
127
진도(陣陶)의 「농서행(隴西行)」에서
앞의 두 행은 평범한 전쟁시인데,
뒤의 두 행이 가슴을 치지요.
가련무정하변골(可憐無定河邊骨)
유시심규몽리인(猶是深閨夢裏人)
강가에 널린 해골들이
꿈속에서 여인들이 그리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거지요.
수석하는 사람이 평범한 돌의
묻혀 있는 부분을 읽어내듯이,
병뚜껑을 보고 사라진 빈 병을 기억하듯이,
빙산의 일각을 보고 잠겨 있는 전체를 짐작하듯이......
시는 그렇게 대상의 숨은 모습을 찾아내는 거예요.
♣ 이성복 시인 ♣
-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 서울대학교 불문과 / 동대학원 졸업.
-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 겨울호를 통해 등단.
- 1982년 ~ 2012년 : 계명대학교 불문과 / 문예창작과 교수.
-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문학과지성사, 2012)
*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 「어둠 속의 시 : 1976-1985」 (열화당, 2014)
- 시론
* 「극지의 시 : 2014-2015」 (문학과지성사, 2015)
* 「불화하는 말들 : 2006-2007」 (문학과지성사, 2015)
* 「무한화서 : 2002-2015」 (문학과지성사, 2015)
- 산문
*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문학동네, 2001)
* 「고백의 형식들 :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열화당,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