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낙동강 파수꾼 2021. 7. 27. 17:13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