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 詩 들여다보기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달과 별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달의 주기에 따라서 자연의 법칙은 순환되어 왔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이 자연의 법칙을 관찰과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다. 우리들은 아무리 달을 관찰해도 그것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그 변화가 씨를 파종하는 것과 어떤 의미 관계를 가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누구에게서 배우셨는지 별들의 신호를 알아들을 수 있다.
달이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은 달력을 통해 확인된다. 12달은 달의 움직임을 주기로 정해 놓은 것이다. 할머니의 달력은 음력으로 계산한 것이리라. 할머니는 매달 스무 여드렛날이 되면 어김없이 밭에 씨를 뿌렸다. 자연에서 씨를 뿌리는 계절은 봄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매달 씨를 뿌리는 행위를 계속한다. 여기에서 씨앗은 생명을 잉태한 것으로 우리들의 삶의 희망이자 양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달 씨를 뿌리는 행위는 삶의 지속적인 양식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이다.
여성은 달의 주기와 맞물리는 생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여성의 생산력은 자연의 토지에 비유되곤 한다. 그들은 자연이 만물을 먹이고 재우듯이 인간을 따뜻한 품에 품어 생명력을 북돋우는 기능을 한다. 할머니는 젊음을 잃음으로써 생산력도 상실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할머니'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품듯이 아직까지도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만물의 양식을 생산하는 기능이다.
할머니는 몸 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의 주름을 닮은 밭고랑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할머니의 힘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삶의 방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는, 대대로 설씨 문중에 내려온 농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생명력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가족의 생명을 지탱시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억센 손길에서 빚어진다. 손이 없다면 가족들에 대한 정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데 할머니는 가족들을 향한 분주한 손길로 가족들의 정신적인 에너지원이 된다.
오히려 할머니는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질수록 별들의 신호를 잘 알아챈다. 인생을 살면서 얻은 지혜는 별들과의 소통을 이루어냈다. 별들 사이의 신호는 씨앗들과도 교통한다. 더 나아가 씨앗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의 의미도 금세 읽어낸다. 그런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할머니의 지혜와 만물과 함께하는 소통의 언어를 배우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가 우리들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어떤 물질도 다른 생명체와 관련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 작은 씨앗 하나로부터 시작한 생명의 싹은 더 많은 생명체를 먹여살린다. 작은 풀 한 포기로부터 우주의 달이나 토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할머니께서 소통하시던 언어는 아직까지 유용하다. 특별한 징표로서 우리 인간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점점 관계의 소멸로 인한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으로 점철된다. 개인은 타인의 위로를 받지 못함으로써 소외당하고 고독해 한다. 인간은 더 이상 땅이나 달과 토성의 기운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살아계시는 할머니의 교신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우리는 할머니가 주시던 따뜻한 손길과 소통의 언어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삶에 온기가 되살아나고 에너지가 충만해질 것이다. 우주에서 넘치는 기운을 받는다면 우리들이 심는 씨앗도 누군가의 또 다른 생명으로 싹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