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낙동강 파수꾼 2021. 6. 27. 10:53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산문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운판(雲版)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 부호로 꼬부라져 우화등선(羽化登仙)해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경 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경전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