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8) / 이성복
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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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쓰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말'에 있어요.
돌을 실에 묶어 빙글빙글 돌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이 도는 힘으로 팔이 움직이게 돼요.
그 느낌으로 글을 쓰세요.
늘 드는 비유지만, 외양간에서 소를 끌어낸 다음
앞세우고 밭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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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어떤 제목이 주어져도
쓸 수 있도록 하세요.
여러 번 그렇게 하고 나면 쉬워져요.
언어의 소리와 빛깔에 민감해지도록 하세요.
항상 낯선 데로, 어려운 데로, 모르는 데로 향하세요.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사랑하는 거예요.
작가는 말이 제 할 일을 하도록 돌보는 사람이에요.
글은 내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이지
내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73
시는 전적으로 말의 일렁임,
술렁임, 속삭임이에요.
시는 뭔지 모르는 거예요.
'오직 모를 뿐(只不知!)'
시를 쓰고 나서, 읽고 나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야
밥에 뜸이 들고, 물이 끓는 거예요.
시를 임신하고 싶으면
'모르는 것'과 섹스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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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가 인용하는 어느 체코 시인의 시구,
"정오에 가끔씩 밤이 강가로 가는 것을 보았다."
거의 실성한 중얼거림이지요.
그 시인의 또 다른 시구,
"말 위에는 죽음과 공작새"
이건 환각이나 착란에 가깝지요.
이렇게 입안에서 중얼거린 말이
시의 첫 구절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구절들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시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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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 사이를 벌려나가야 해요.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가서 잡아주면 돼요.
산 끝자락이 되올라가는 것을 두고
'회룡고조(回龍顧祖)'라 하지요.
용이 휙 뒤돌아보는 모습.
글쓰기도 그래요.
끝에 가서 흐름을 거슬러야 힘이 생겨요.
마지막에 부르르 손을 떠는 헌병들의 경례,
시도 그런 게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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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를 발리볼(volley ball)이라 하지요.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쳐야 해요.
시도 의미가 파악되면 바로 죽어버려요.
무협영화 고수들은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싸우지요.
땅바닥에 내려서면 산문이에요.
시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건너뛰는 거예요.
묘사하고 설명하는 시는 이미 죽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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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일차적으로 언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언어의 자장(磁場) 속에 우리가 동원되는 거지요.
언어 안에는 잊혀진 무언가가 숨 쉬고 있어요.
그것을 찾으려면 언어와 함께 숨 쉬어야 해요.
시인은 언어로 땅을 두드려 길을 찾는 사람이에요.
시인의 언어는 도굴꾼의 지팡이 같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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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고도로 에너지가 충전된 언어예요.
음악과 이미지는 보조 장치이고,
충전의 원동력은 말의 비틀림에 있어요.
앞뒤를 잘 잡고 비틀어야 시가 돼요.
"너나 잘 하세요." "미안해요, 씨발놈아!"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비틀림이 충격과 감동을 가져와요.
자기 글에 통렬한 비틀림이 있는지 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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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는 잡고 있으면 막 꿈틀거려요.
산문이 막대기를 잡고 있는 것 같다면,
시는 뱀을 잡고 있는 거예요, 꿈틀 꿈틀 꿈틀......
시의 언어는 벗어나고 거스르는 언어예요.
마찰과 저항이 없으면 쾌감도 없어요.
마음속 뒤틀림이 있어야 시가 돼요.
그래서 악마주의가 시에 가깝다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뒤통수치는 거예요.
바람피울 생각을 하라니까요, 항상.
따분한 얘기로 독자를 괴롭히지 말고
당장 사기 칠 궁리를 하세요.
80
살바도르 달리는 돈을 많이 밝혀,
'달러에 미친 놈'이라 했대요.
그런데 이 말은 그의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어요.
Salvador Dali = Avida Dollars
이것을 애너그램(anagram)이라 하는데,
시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어요.
시 또한 색맹 검사할 때처럼,
숨은 패턴을 찾아내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