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4) / 이성복
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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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어둔 김장독을 꺼낼 때
유물(遺物) 발굴하듯이 하지요.
자기가 하려는 얘기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여기서 물 한 말을 보냈는데,
저쪽에서 한 주전자밖에 못 받았다면
보낸 사람 잘못이에요.
그냥 배가 아프다, 하지 말고
'우리하다'든지, '콕콕 찌른다'든지
듣는 사람이 좀더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의미 전달은 가능한 한 '원 샷'으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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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지 균형 잡는 것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 같아요.
자기 얘기를 너무 해도 지겹고,
안 해도 재미없어요.
그러니 삐딱하게 얘기해보세요.
중얼중얼하는 것 같은데,
확 빨려 들어가도록 말하세요.
쓰레기 태우는 데 가까이 있다가,
불길이 확 다가오면 놀라지요?
그렇게 하세요.
파도가 왔다 갔다 하다가,
확 다가오면 깜짝 놀라지요?
그렇게 하세요.
지난번 동해에서 6미터 높이의 해일이
소리 없이 다가와 몇 사람 데리고 갔지요.
좋은 시는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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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불륜'이라 할 수 있어요.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 원래 부산 가기로 했는데,
추상미한테 반해서 경주에서 내려버리잖아요.
위반하는 글쓰기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작중인물이 작가를 배반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해요.
글쓰기에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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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입구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여러분 몫이에요.
글쓰기가 자기 근육에 입력돼 있어야 해요.
씨름할 때 상대에게 딱 달라붙어야
힘을 쓸 수 있잖아요.
시 쓸 때도 남 얘기하듯 하지 말고,
무조건 달라붙어야 해요.
좀더 간절하게, 절박하게, 속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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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젓가락으로 깨를 집는 것과 같아요.
분명히 집을 것 같은데 잘 안되지요.
손과 머리가 따로 놀기 때문이에요.
테니스 처음 배울 때, 라켓 커버 씌운 채
몇 달 동안 연습한다고 하지요.
그래야 바른 자세를 익힐 수 있다고 해요.
글쓰기 또한 자세부터 만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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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에서 포핸드보다 백핸드가 쉽다고 하지요.
포핸드는 늘 하던 익숙한 동작이라
새 길을 입력(入力)하기가 어렵다 해요.
반면에 백핸드는 평소 하지 않은 동작이라
한 번 배우면, 다른 길로 빠질 가능성이 적다는 거예요.
귀때기 때릴 때도 백핸드로 때리진 않잖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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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대단한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돼요.
나는 물건을 잘 못 찾거든요.
우리 집사람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찾아보지도 않고......"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다는 거예요.
농구선수 이충희가 그랬대요,
연습 끝나고 집에 간다 해놓고,
혼자 돌아와 공을 천 번 더 던지고 갔다고......
많이 쓰세요. 이 구석도 들여다보고
저 구석도 들여다보고......
민감하게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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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젓가락질, 골프 스윙......
모두 반복 훈련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시적으로 말하는 것도
계속해서 연습해야 해요.
연습할 때는 쉼보르스카 같은 시인의
어법을 빌려도 괜찮아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그 틀을 뜯어내면 되니까.
어디 가서 푹 파묻혀
30쪽 짜리 노트 한 권 다 쓰고 오세요.
될 대로 되라 하고 쓰다 보면
글과 나 사이에 간극이 없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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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계란 잡듯이,
가볍게 시작하라는 거예요.
아무 부담이 없을 때 가장 맑은 목소리가 나와요.
지나가다가 가래침 한 번 툭 뱉듯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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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쓸 때 유념해야 할 것은 부양(浮揚)이에요.
비행기가 이륙하는 느낌으로
달려가다가 스윽 떠오르는 그 맛......
처음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요.
그런 다음 말이 말을 타고 슬쩍 떠오르기.
한 발 두 발 내딛는 척하다가
돌려차기로 때려주기,
그것이 인식이고 발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