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시간 - 論文 · 詩作法 외

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3) / 이성복

낙동강 파수꾼 2021. 4. 18. 15:59

 

이성복 詩論 : 불화하는 말들 (13-3)

 

 

 

21

 

 

씨앗 하나가 자랄 때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막막함은 시작도, 끝도 막막해요.

수평선과 지평선의 막막함......

 

막막함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긑긑내 닿을 수 없는 것이에요.

 

이 막막함이 글에는 생명을 주고,

글 쓰는 사람을 정화(淨化)시켜요.

 

항상 막막함을 앞에다 두세요.

그러면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쓸 수 있어요.

 

 

 

22

 

 

글쓰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어요.

우리가 병들어 있음을 알게 하는 것도,

또 병에서 낫게 하는 것도 모두 내러티브지요.

 

그렇다면 이런 문장이 성립하겠지요.

'비유할 수 없는 것은 치유할 수 없는 것.'

 

 

 

23

 

 

시 쓰는 사람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자기'라는 것도 관념일 뿐이에요.

 

습관과 무감각은 우리를 살게 해주지만

우리를 삶과 절연(絶緣)시키는 것이기도 해요.

시가 고통스러운 것은 고정관념을 벗기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거에요.

 

 

 

24

 

 

시간과 공간을 낳는 것이 몸이라면,

그것들의 한계를 아는 것도 몸이에요.

 

「주역」에서 '근취저신 원취저물(近取諸身 遠取諸物),'

가깝게는 몸에서 취하고, 멀게는 사물에서 취하라고

하지요.

 

글은 내 몸에 딱 붙여 써야 해요.

아무리 밀고 당겨도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25

 

 

동그라미 정중앙에 잇는 점(點)은

안정되어 보이지요.

그런데 한 귀퉁이에 찍힌 점은,

뭔가 불안해 보이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동그라미 안 어디에 찍힌 점이든

중심으로 수렴되지요.

 

중심과 관계 맺으면 외로울 게 없어요.

"송이송이 눈송이 딴 데 떨어지지 않네"라는

방거사(龐居士)의 말도 그런 뜻 아닐까 해요.

 

 

 

26

 

 

'첫사랑'에 대해 먼저 '말'로 이야기 해보세요.

글로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묻어나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쓰고 나서 내가 무진장 아파야 해요.

사랑은 소용돌이고 물결이고 벼락이라서

나도 모르게 바깥에서 덮치는 거예요.

사랑이 아닌 시가 어디 있겠어요.

 

 

 

27

 

 

'첫사랑'에 관해서 다시 써 오세요.

좀더 보이게, 생생하게,

그러나 다 써주지는 말고 모호하게,

그래서 여운이 남게,

그렇다고 첫사랑 찾아가서, 연애 다시 하진 말고. (웃음)

 

 

 

28

 

 

시인 줄 알고 빠지는 함정들이 몇 가지 있어요.

우선 비유가 많아야 시가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시의 비유는 피상적이고 장식적이에요.

 

다른 함정은 시적인 정서가 따로 있는 줄 아는 거예요.

방금까지 깔깔거리던 사람도 시 쓰라고 하면

금세 그리움, 외로움, 괴로움 같은 폼을 잡아요.

 

마지막 함정은 시적 화자와 산문적 화자를 혼동하는 거

예요.

산문에서는 화자가 떡 버티고 서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 반해,

시에서 화자는 모든 재량권을 '말'에게 주지요.

 

 

 

29

 

 

뭐든 바깥으로 꺼내 자랑하려 하지 말고

숨겨야 해요. 그래야 힘이 있어요.

 

'의금상경(衣錦尙絅)'이라는 말 있지요.

비단 옷 위에 삼베옷을 껴입는다는 거예요.

힘 좀 있다고 아무 때나 힘자랑하면 동네깡패밖에 안

돼요.

 

회암(晦庵), 회재(晦齋) 같은 옛사람들 호에서

'회'는 '어두울 회'예요.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는 거예요.

 

뭐 좀 안다고 자랑하면

독자가 웃어요.

 

 

 

30

 

 

김소월 시에는 유행가 가사처럼 가다가

어느 순간 확 꿰어서 낚아채는 걸 볼 수 있어요.

끝에 가서 묶는 방식이 그렇게 중요해요.

 

또 「초혼(招魂)」에서처럼, 시의 화자가

실성하는 모습을 보일 때 확 빨려 들어가지요.

그렇게 해서 시인은 읽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