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 닦기 (9-9) / 위선환
시의 초심 닦기 (9-9)
● 원초적인 것은 아름답다. 원초적인 것은 언제나 최초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 감각과 직관의 세계를 흔연한 모습으로 접할 수 있다. 시론을 강의하면서 늘 얘기하던 본연 순연한 사물들이 감각과 직관의 존재로 다가서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감각과 직관의 사물이 의미와 관념으로 굳어져 버리게 되면서 순수한 존재를 잃게 되었고, 신화적 언어, 주술적 언어의 그 초월적 힘들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말의 힘이 소진된 채, 기능성만 강조된 무뚝뚝하고 투박한 개념어들만 들끓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 소음의 언어, 관념의 언어에 묶여 산다.
- 이건청, 《시와 상상》 2007년 여름호
● 문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한 개인의 마음이 여유로워질 때(특히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대면하는 경우) 자칫 생길 수 있는 시적 긴장의 완화나 시인 자신조차 기만하는 세계와의 거짓화해의 문제다.
내가 보기에 한 때 정치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강력한 분노를 표출하며 치열한 정신적 고투를 보여주었던 시인들이 90년대 이후 자연의 예찬론자로 변하는 경우가 있어, 이러한 '여유'를 미학적 긴장의 상실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한때 치열한 정치세계로부터 90년대 이후 평화로운 자연으로 귀향한 시들이 자연(생명)에 대해 어딘지 과장스러운 예찬론을 펼치는 경우, 자연을 시적 주체의 손쉬운 감정이입 대상으로 오부제화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시적 긴장의 지리멸렬함은 '시적 서정' '생태주의' '에코 페미니즘' '선'의 수사학이나 정치적 보수주의로 둔갑하면서 실은 또 다른 방식의 나르시시즘의 시학을 직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문제는 '서정의 동일성' 자체가 아니라, 미학적 긴장의 지리멸렬을 '동일성의 시학'이라는 일련의 미학적 태도 자체의 본질인 것처럼 속이거나, 미학적 긴장의 상실을 '시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추상적이기도 한 '정치적 진보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그 우산 밑으로 숨으려는 자기기만의 태도다.
● 시인이시여, 제발 '화해' 또는 '해탈'하지 마시라!
- 함돈균, 《현대시학》 2007년 6월호 '새 시집 읽기'에서
● 시인이 사물을 다루는 언어는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을 통해 탄생한다.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시는 결코 낡지 않는다. 그 새로움이 오래된 것일 뿐, 시가 세계를 드러나게 한 해석은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 곽명숙, 《시와정신》 2007년 여름호
● 경계해야 할 것은 환상의 과잉이 아니라 감각과 사유의 긴장이다. 우리의 시는 때로 감각이 사유를 대신하거나, 사유가 감각을 말소하는 형국을 보인다. 이미지는 현실적 맥락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세계를 전복하는 힘이 되지 못하고, 과다출혈된다. 혹은 빈약하여 빈혈증을 앓기도 한다. 서정은 反서정 혹은 非서정과 혈투를 벌이느라 스스로를 소모하고, 감각은 관념적 동일성에 대적하느라 너덜너덜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유하되 감각하고, 감각하되 사유하는 일이다.
- 신진숙, 《시와정신》 2007년 여름호
● 상식적인 말이지만, 어떤 면에서 시인은 언어를 가장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을 두고 언어의 세공사, 언어의 장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시인이 되기는 어렵다. 물론 언어의 세공만으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의 세공은 좋은 시의 필요조건이 될 것이다.
요즘은 언어감각이 의심스러운 시인이나 작품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번에 예심을 통과한 다섯 분의 응모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거칠고 투박한 언어를 종종 만나게 되어 마음이 불편했다. 거칠고 투박한 언어가 시의 전략으로 선택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언어를 다루는 능력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언어감각의 빈곤과 더불어 심사를 하면서 불편했던 점은 산문성의 범람과 상식의 결여이다. 많은 시들이 산문적이고 말의 낭비가 많다. 시적인 울림과 리듬과 긴장이 부족하다. 이 점은 오래 전부터 우리 시단의 병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우려되는 경향은 상식의 결여가 아닐까 한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이상한 소리, 비상식적 언어의 배열이 아니다. 시야말로 상식적이다. 알 수 있게 써야 한다. 도대체 누가 읽으라고 아무도 모를 소리를 하는 것일까? 시는 의미의 파괴가 아니라 의미의 구축이며, 시는 문법의 파괴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문법적 질서이다.
- 강현국, 구석본, 이남호, 《시와반시》 2007년 여름호 '신인작품 심사소감'
● 지금 파고다 공원에 있는 만해 스님의 비(碑)를 세울 때 통도사 경봉 스님이 만해의 유일한 제자인 춘성(春城) 스님에게 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만해의 행장과 자료 같은 것을 달라고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에 춘성 스님은 '경봉 보시게. 우리 스님이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 가고 글을 쓰고 책을 찍어 낸 것, 사람들 모아 놓고 연설한 것, 그것이 우리 스님의 비명(碑銘) 아니겠는가. 돌 한 덩어리 깎아 세운다고 비가 되겠는가. 부질없는 짓거리 하지 말게. 나 우리 스님에 대해 아는 바 없네. 만구성비(萬口成碑)일세' 이런 내용으로 답을 보냈다.
만구성비- 만인이 만해스님을 받들면 그것이 만해의 비가 되듯, 상이란 것도 작품이 좋으면 그 작품이 그대로 상 아닐까. 지금 우리 시단에 진작 상을 받은 작품보다 상을 받지 못한 작품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훨씬 많지 않은가.
소종멸적(掃踪滅跡)-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사람이,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까지 다 내다 버려야 할 놈이, 시를 쓰고 상을 탐하여 상을 받게 된 것이 낮꿈이 아니니 시방 내가 묵형(墨刑)을 받는 것 같다. 분반(噴飯)- 밥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내 시는 아직 누구의 가슴에도 상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죽을 때가 되니 피모대각(披毛戴角)- 몸에 털이 나고 머리에 뿔이 돋는구나.
- 조오현, 《시와 시학》 2007년 여름호 '정지용문학상 수상소감' - 피모대각(披毛戴角)
● 시를 고칠 때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군더더기를 지우는 일입니다. 그 방법 역시 선생님께서 몸소 실천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생각나세요? 제가 습작 노트를 가져다 드리면 선생님께서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은 바로 붉은 볼펜으로 줄을 죽죽 긋는 것이었습니다. 호적등본에 등재된 이름에 사망자 표시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론 어떤 시는 한 행밖에 살아 남지 못할 떄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럴 때마다 오기를 품고는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칼날 같은 검열에서 더 많은 행이 살아남는 시를 기필코 써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말입니다. 그 오기를 북돋워주신 날들이 있어 아직 제가 시를 붙들고 사나 봅니다.
- 양선희, 《현대시학》 2007년 3월호 - 故 오규원 시인 추모 에세이
● 자연에 몸을 깊게 담고 있거나 구도적인 마음의 운행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動察보다는 靜存에 익숙하고 그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이건 바른 자세는 아니다. 진정한 見性이란 무엇인가. 보는 일에 <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쪽만 나타나고 저쪽은 나타나지 않는다. 반쪽이 되어버린다. 산 마저도 바라보는 내게서 염증을 일으킨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게 바로 시에서 무심코 범해지고 있는 '화자의 우월성'이다. 이게 극복되지 않은 시에는 생동하는 세계가 없다. 정존에 머물면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 정진규, 《현대시학》 2007년 2월호 '권두시에 붙이는 말'
♣ 위선환 시인 ♣
- 1941년 전남 장흥 출생
- 1960년 '용아문학상'을 수상하고 작품활동을 하다가, 197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음.
- 2001년 《현대시》 9월호에 '교외에서' 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다시 시작.
- 시집
*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한국문연, 2001)
* 「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한국문연, 2003)
* 「새떼를 베끼다」 (문학과지성사, 2007)
* 「두근거리다」 (문학과지성사, 2010)
* 「탐진강」 (문예중앙, 2013)
* 「수평을 가리키다」 (문학과지성사, 2014)
* 「시작하는 빛」 (문학과지성사, 2019)
- 《현대시》 작품상(2008), 《현대시학》 작품상(2009)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