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 / 장석남
옛 노트에서
그떄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詩 들여다보기 :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이란 책을 보면,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위대한 업적과 천재성의 중심에 그들의 '노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내린 영감을 착상에만 머물지 않고 깨알 같은 글자들로 끊임없이 채워나간 뉴턴의 노트는 위대함에 이르는 기록의 습관을 확연히 담은 증표로 평가된다.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있어 문자로 기록된 옛 노트가 지혜와 기억력을 확장해 주는 믿을 만한 바탕이자 보증수표이듯이, 시인에게 있어 옛 노트는 유년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풀밭의 바람으로 수런거리며 이 세계 바깥까지 오랫동안 투명하게 쌓은 지혜와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바탕이자 계단이 된다. 이러한 의도를 구체화하기 위해 시인은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로 표현된 유년의 꿈과 기억들의 노트를 '풀밭의 그 수런댐'과 같이 묶으며 시의 초두를 전개시킨다. 여기서, 동사에서 비롯된 명사형 단어 '수런댐'을 굳이 사용한 것은 이 세계 바깥까지 긴 시간을 견디며 투명한 개울을 만들게 한 과정의 구상적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적 감흥의 모티브로 작용한 옛 노트 속의 수런댐들은 손에 잡히기 힘든 동사적 속성의 운동성보다는 명사적인 형태로 파악되는 운동성을 지칭하며, 나아가 비현실적인 감성의 모티브가 아니라 좀 더 시인의 일상 옆에서 숨 죽인 현실감으로 가득한 유년으로 인도하는 계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봄꽃이 다 지고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길목에서 앵두는 익는다. 유년의 시골집 담장 안에서 그 앙증맞은 자태로 빨갛게 익어가는 앵두. 그앵두가 엣 노트에 선하다. 새큼하고 달콤한 유년의 기억들이 수런대는 시인의 옛 노트를 지금 펼쳐 보자. 유년의 앵두가 익을 무렵을 지금으로 환기시키는 시인의 옛 노트. 그것은 일상의 수런댐을 투명한 개울로 감싸 안으며 유년의 빛들 가득한 계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