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 박형준
홍시
뒤뜰에서 홍시가
철퍼덕철퍼덕 떨어지는 밤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에
아버지처럼 누워서 듣는다
얇은 벽 너머
줄 사람도 없는디
왜 자꾸 떨어진데여
힘없는 어머니 음성
아버지처럼
거그, 하고 불러본다
죽겄어 묻는 어머니 말에
응 나 죽겄어
고개를 끄덕이던
임종 가까운데
자식 오지 않고
뻣뻣한 사족
이불 밖으로 나온 손
가슴에 얹어 주던 어머니
큰방에 누워
뒤뜰 홍시처럼 가슴에
둥글게 주먹 말아 쥐고
마을 가로질러 가는
기차 소리 듣는다
♣ 詩 들여다보기 :
왜 그런지 유년을 생각하면 도시보다는 시골의 풍경이 떠오른다. 곡식이 무르익은 따뜻한 가을녘과 어울린다. 형제가 많은 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나이. 어린 형제들은 먹을 것으로 싸우고, 집안의 간식은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홍시가 떨어지는 시골. 늦가을이고, 모든 것은 풍성하게 익었는데 이젠 풍성한 수확을 즐길 사람이 없다. 감나무를 타고 오르다 다치는 악동도, 솥단지 속 감자를 몰래 빼 먹는 점순이도 없다. 빈 시골집.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한 사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방에 누워 홍시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낙과(落果). 그 달콤한 과즙이 오갈 데 없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밤. 아버지는 분명 쉽게 죽지 못하고 자식을 기다렸을 것인데, 사내는 그것을 알면서도 무슨 연유에선지 오는 길이 자꾸만 지체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엔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약한 모습을 보일 때의 그 묘한 기분. 아버지도 나약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슬픈 깨달음. 아버지는 뭐든 다 알 것 같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높은 사람인 줄 알았던 유년시절이 화자는 더 편안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버지도 집 밖에선 똑같은 약자라는 것. 그것만은 장년이 된 후에도 봉인되었으면 하는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영원한 유년도 청년도 없다는 간단한 이 진리를 왜 우리는 자꾸 잊는 것일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오지 않는데. 시간이란 참 정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