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자전거 / 이혜경
고장난 자전거
나는 비로소
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나를 목 놓아 그리던 무게도 촉감도
지나간 기억 속에 꿈틀거릴 뿐
피곤해도 쉴 수 없던 내 다리
비로소 자유로운 차디찬 인내력
날카로운 시간, 온몸에 새기며
줄타기하던 나의 이력은
아파트 담장에 빼곡이 진열된다
내 곁을 지키는 고상한 폐품들
가쁜 숨 몰아쉬던
뒤로한 꿈들을 이야기한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들은
침묵의 저편으로 날개를 접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위해
온갖 무게를 잠재우며 달렸다
이제, 죽음을 향한 속도는
또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 열려 있다
분주한 바람은 빛바랜 세월만 이야기할 뿐
내 위에 어떤 무게도 잠재우지 않는다
등줄기를 타고 출렁이는 고독의 물결
새로운 자유가 선택되는 순간이다
기울어지는 노을의 화려함 속으로
푸른 생을 적시는
다리 하나 부러진 내 육체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은 시간이다.
♣ 詩 들여다보기 :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도구들을 만들어 왔다. 자전거는 인류가 만든 발명품 중 손꼽히는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말과 마차 뿐이었던 시절, 발명가들은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명하고자 했다. 두 바퀴에 담긴 역사는 그렇게 소박하면서 인간적인 것이었다. 오로지 사람의 땀내로만 움직이는 자전거는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인 사물이다.
모든 사물에는 사연이 있다. 왜냐하면 사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고안되고 형태를 갖추며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 앞에서 인간은 창조주의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이 시는 조물주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닌 동격의 대접(待接)으로 가슴 적시며, 자전거란 사물에 담긴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를 시인의 사연으로 읽어내는 시적 혜안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기능을 갖추고 태어났지만 이제 제 기능을 상실하고 길가의 폐품처럼 사용가치를 놓아버린 자전거를 보며 시인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자신의 땀내를 기울어지는 노을의 화려함 속에서 되돌아본다. 그와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시적 상상력으로 포착해 낸다. '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자전거의 입장에서 보면, 오로지 인간의 다리를 통해 전달되는 동력을 하사받아서 온 바퀴로 달리라는 태생적 명령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를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며 투영해 내는 시인에게는 신이 날카롭게 울타리 지운 시지프스의 형벌을, 가쁜 숨 몰아쉬며 수행해야만 하는 숙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된다.
고장난 자전거 앞에서 시인은 가쁜 숨 몰아쉬던 꿈들을 돌아보며 이야기하지만 위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빨리 가는 것으로만 치자면 자동차가 훨씬 가치 있지만, 자전거는 인간의 살갗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스스로 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치 있는 경쟁력이 있기에 시인은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위해' 온갖 힘겨운 무게를 잠재우며 다리 하나 부러진 육체의 사연을 시 속에 빚어낸다. 푸른 생을 적시며 무던히도 달리더니만 이제야 비로소 멈춰버린 자전거. 그러나 그 자전거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은 시간'을 향해 새로운 도구로 탄생하려 준비 중이다.
* 그리스어의 'psyche(혼)'와 'metron(측정)'이 합성된 단어로서 '어떤 물건의 혼을 측정한다'는 의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