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파수꾼 2020. 10. 26. 18:11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 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 詩 들여다보기 :

 

   탄생에는 언제나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새로운 출발이면서 하나의 완성이기도 한 탄생은 잉태의 시간을 통해서야만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탄생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점이 된다. 어떠한 탄생에도 피나는 인내와 시련이 따르며, 고뇌와 힘겨운 순간이 함께 한다. 위 시는 석류가 익어 갈라지면서 그 속살을 드러내는 고통의 순간을, 시인이 경험한 사랑을 잉태하다 겪었던 가슴앓이로 표현하고 있다.

   가을날 담장 밖으로 휘어지는 가지를 드리우고 붉게 물든 시간을 쏟아놓는 석류는 익으면서 쪼개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여러가지 상징적 의미를 일깨운다. 석류는 성숙되는 순간에 반드시 제 몸을 쪼개어 그 안의 내밀한 언어들을 드러내 보이는데, 이때 석류의 붉은 속살은 마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싱싱한 석류의 속살은 신선한 시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어는 일상의 나태와 상투성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류는 자연의 변화를 따라서 서서히 성숙해온 것이다. 석류 가지에는 어느 순간 꽃이 피었을 것이며 그 꽃이 진 자리엔 하나의 작은 석류 열매가 눈을 떴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체험과도 같다. 화려한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남는 상처이자 흔적에 맺히는 열매-.

   시인은 이러한 내면의 고통을 '잉걸불 같은 그리움',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 '온몸을 휩싸고 도는 / 어지러운 충만'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확장되어 가는 상처의 고통은 끝내 사랑의 힘으로 익는다. 드디어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 더 아프게' 깨어지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석류는 봄부터 쉬지 않고 일구어 온 결실이자 새로운 하나의 의미로 탄생하게 된다. 

   석류가 익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한 알 석류의 탄생을 위해서 관여하였던 것인가. 우주의 시간과 공간 요소들이 석류 안으로 모여들면서 봄밤의 소쩍새 울음소리가 스미고, 여름날의 매미소리와 뜨거운 태양도 사정없이 녹아들고, 장대비와 긴 밤의 고독도 절절하게 사무쳤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들이 참답게 어우러지고 익어가면서 비로소 완성된 한 알의 석류는 하나의 우주이며 한 편의 완성된 시이다.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가을날 한 알의 석류가 제 몸을 가르며 그 사이로 홍보석처럼 내보이는 속살은 피범벅이 되어 있다. 고통 없는 사랑이나 고뇌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시인은 한 알의 석류가 익는 과정을 고통스런 사랑의 열정과 시를 앓고 있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으로 대비시켜 잘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