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늦여름 오후에 / 홍신선

낙동강 파수꾼 2020. 9. 1. 17:56

 

늦여름 오후에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편에나 실려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청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꼍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 「자화상을 위하여」, 세계사, 2002 ; 「홍신선 시선집」, 산맥출판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