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 정진규
낙동강 파수꾼
2020. 6. 22. 19:23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
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
로다 전 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 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