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바람 한 줌 / 이형기

낙동강 파수꾼 2020. 3. 29. 19:47

 

바람 한 줌

 

 

꽉 쥔다.

기대에 부푼 가슴 누르고

조심스레 펴 보는 빈 손바닥

바람 한 줌.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가

나의 왕국은

빈 손바닥 그 위에

사막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상주민은 없다.

우주를 향해 사방으로 길이 틔어

누구나 바람처럼 오가는 나라

그래서 더욱 은성하는 그 나라

 

모든 생산은 꿈이 맡고 있다.

이를테면 꿈이

씨줄 되고 날줄 되어 짜내는 환상의 직물

벌거벗은 임금님의 보이지 않는 옷감!

 

침략에 대비하는 막강한 군대여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밤내 켜고 버린 성냥개피들

스스로 모여들어 조직한 군대여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가

쥐었다 펴면 빈 그 자리

나라 하나를 덮는 손바닥

바람의 조화를!

 

* <보물섬의 지도>, 서문당,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