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그림자 - 초대詩 · 時調

견고한 고독 / 김현승

낙동강 파수꾼 2020. 3. 8. 16:51

 

견고한 고독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견고한 고독>, 관동출판사, 1968 ;  <김현승 전집 1>, 시인사, 1985